•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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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기독교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자로서 ‘제1회 평택 역사문화로드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초청을 받은 감회는 남다르다. 수도사 주지 스님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으나 아니 벌써 교회 장로와 더불어 신구약성경을 통독했다는 말씀에 놀라며 아주 좋은 기회라 여기고 흔쾌히 토론에 임하기로 했다. 순서지를 보니 가장 먼저 삼귀의례(三歸儀禮)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이란 사자성어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오히려 난생처음 접하게 될 장엄한 불교의식이 기다려지며 얼마 남지 않은 원고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냉큼 토론 자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김경집 진각대 교수의 “원효의 구법행로에 대한 연구”는 고대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거늘 오래된 역사마저 가물가물하니 신라 구법승들의 행로 또한 생소한 느낌이지만 이내 출발지였던 당항진의 개칭(改稱)과 위치에 대한 정보에 눈길이 갔다. 각주를 보니 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삼국유사는 읽어보았어도 삼국사기는 제목만 들어온 처지인지라 상식적인 고대역사의 범주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에 들어온 대목은 신라가 당항진을 두어 대당해로(對唐海路)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지점이었다. 발 빠르게 남북왕조에 사신을 보낸 진흥왕의 외교술이 돋보이는 장면이었거니와 이어진 중국 왕조와의 교류에 힘입어 불교는 융성했고, 원광을 비롯한 안함(安含), 자장(慈藏) 등 적잖은 구법승들이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원효와 의상대사의 두 번에 걸친 구법행로는 1차(650)에 험난한 육로를 택한다. 까닭인즉슨 당대 유명세를 타던 평양 반룡사의 보덕화상에게서 열반경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우려는 학구열이었다니 존경스럽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첩자로 몰리는 바람에 금세 돌아오고 만다. 2차(661) 구법행로 역시 보장왕이 취한 ‘숭도억불(崇道抑佛)’ 정책에 따라 거처를 완산주로 옮긴 보덕화상을 찾아 계획했던 배움의 허기를 채운 뒤에야 ‘당은포’로 이름을 바꾼 당항진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관심이 가는 지점은 당시 당은포의 위치가 평택 포승읍 지역으로 유추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평택섶길을 걸으며 엿들은 얘기로는 오래전에는 안성천이나 진위 오산천까지 소금배가 들락거렸다니 내륙의 송탄동인들 아예 관련이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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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의 “慧超 <往五天丑國傳>의 海路說”을 통해 국내 최초로 논구한 혜초의 바닷길을 살펴본 성과는 크다. 교직 생활 틈틈이 해외 40여 개국을 나다닌 가운데 인도가 그 첫 여행지였기에 그렇고, 해상실크로드가 아시아하이웨이를 따라 펼쳐질 때를 학수고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삼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국의 一帶一路에 섣불리 동행했다가는 공정치 못한 동북공정을 추인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저어되는 형국은 막아야겠기에 내심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요즘 한창 중국몽에 젖어있는 그들의 ‘海上紗綢之路’를 보며 발표자가 제안한 를 맞이할 준비만큼은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고견에는 하등의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이름도 정겨운 ‘당나루’의 초점은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에 모아져 있다. 만약 당항성 아래 현 남양만 어딘가에 ‘당은포’가 있었다면, 입국절차를 거치는 ‘海門’이란 관청이 있어야 한다는 게 논자의 추정이다. 지금의 평택당진항을 대상지 중 하나로 꼽는 건 그래서다. 전거는 기호지방의 옛 지도 중 1862년에 제작된 <水原府地圖>에 ‘大津’이란 지명이 표시돼 있고 그 하단을 보니 ‘대진에 백제의 수군 창고가 있었으며 ‘稤館(수관)’이라는 관청까지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는 <수원부지도>를 비롯하여 <동국지도>, <해동여지도>, <경기도>,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한도숙에 따르면 평택항은 19세기 중반 세기의 장사꾼 오페르트가 기웃거릴 만치 수심이 깊고 보면 적어도 아산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눈길을 끈 내용은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최초의 시가 黃鳥歌에 나오는 ‘翩翩’이란 표현에 있지 않거니와 당시 신라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무슬림 상인들과 교역했다는 史實이다. 이는 아라비아 박씨 성을 가진 학생을 가르쳤다는 지인 교사의 전언이나 8구체 향가인 處容歌의 시대적 배경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라를 현대 중국어 발음인 ‘sinlo’나 ‘sinla’로 통한 게 아니라 ‘sila’나 ‘shila’로 불렀다는 대목이다. 720년의 <日本書紀>나 <崇神記>에도 나온다고 하니 더 수긍이 간다. 난해한 문제를 공들여 풀어헤친 연구자께 경의를 표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08호)에는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 평택섶길을 소환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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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원효대사를 회고함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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