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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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이 있었던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1. 대진(大津, 위치: 평택시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포승읍 만호리의 솔개바위나루의 옛 지명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진(漢津), 만기요람에는 대진포로 표기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수원부 편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했다. 대진은 좌우 폭이 10여리나 됐다. 대진 부근은 암석이 많으며 물 흐름이 무척 세고 빨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만기요람에도 바람이 일면 파도가 매우 심하다, 조세(潮勢)가 사납다라고 기록했다.

 

조선 고종 때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이었다. 조선방역지도여백에 대진삼국시백제어혜군지가리저동치수군창신라평백제치관적욕호수관당지사개상매개취관라인조공역유자인명대진(大津三國時百濟於槥郡之可里渚東置水軍倉新羅平百濟置館積穀號稤館唐之使价商賈皆就館羅人朝貢亦由此因名大津)’라는 문장이 표기돼 있다. 대진은 백제 때는 수군창이 있었으며,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당나라를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포승읍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포내면과 승량동면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포내면은 고려시대에 포내미부곡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에도 포내미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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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승읍 만호리 대진나루

 

조선 초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설치됐다. 수군첨사의 설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군만호로 격하됐고, 1457(세조 3) 1월에는 왜구의 침입이 중단되면서 아산만 입구 난지도의 수군만호와 통폐합됐다.

 

수군만호가 폐지된 뒤에도 대진은 충청도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의 요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와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해, 충청도 서북부의 당진·면천(서산·태안·홍성() 등 여러 읍()과 교통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도 대진은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로로 역할을 했다. 만호리 주민들은 안중장날이면 당진·서산·태안에서 한선에 소를 싣고 오가는 소장수들로 인해 나루터가 붐볐다고 기억하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다음호(664)에서는 아산만 연안과 발안천 수로의 포구 - 호구포(虎口浦)와 자오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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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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