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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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연일 소논문의 각주를 채우느라 뜨거워진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찾은 아산만은 주말치고는 한산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심술을 탓해야 할지 짓궂은 팬데믹의 손장난을 나무라야 할지 우리 사회는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거 같아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게다가 살인적인 고물가 때문인지 바지락 칼국수마저 내심 바라던 맛이 아니었다. 서둘러 도착한 주차장에서 미리 훑어본 자료집. “평택 역사 특강”에 붙은 두 가지 제목을 보니, 본 토론자 역시 ‘원효대사’에 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간 궁금했던 ‘괴태곶’에 얽힌 지난날의 궤적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듯하다. 아주 먼 옛날이니 삼국시대는 건너뛰더라도 높고 고운 나라 고려(高麗)로 거슬러 올라가 평택지역을 관할했다는 양성현이 수원에 속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했다는 사료보다는, 18세기 수도암(修道庵)이 괴태곶 봉수대 아래 있었다는 고서의 풀이가 먼저 한눈에 들어온 이유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19세기 양성읍지에도 수도사(修道寺)는 그대로 있었고, 보시다시피 하루해가 멀다 하고 격변하는 오늘날에도 이같이 건재하다.


  원효대사에 대한 현대인들의 상식선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앞다퉈 본받을 만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다만 네 번째 항목에는 깊이 들여다볼 지점이 보인다. 물론 여말 이승휴의 <帝王韻紀>나 선초 고서경과 김지의 <大明律直解> 등의 기록을 간과한 바는 아니로되 설총이 이두(吏讀)를 만들었다는 설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해독이 어려운 한문에 문장의 순서까지 영어를 빼닮아 우리말 어순이 절실하던 참에 평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두라는 뒷말의 독음을 보아도 신라 때보다 훨씬 전부터 쓰이던 구결(口訣)의 토(吐)와 같은 어원인 ‘讀(두)’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주로 품외 서리(胥吏)들이 쓰던 글자이므로, 설총은 이두의 창안자라기보다는 난분분하던 표기 체계를 집대성한 자로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의견이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한국어 요소를 담은 변체한문)을 비롯한 최근 발견되는 고고학적 목간(木簡)을 참고하더라도 설총의 시대에 비해 6세기 정도 앞당겨진 시점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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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말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원효와 의상의 관계다. 백승종 교수가 제시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에는 당시 이규경이 쓴 ‘원효와 의상에 대한 변증설’이 실릴 정도였다는데, 내막인즉슨 ‘의상은 원효의 아들로서 익히 알려진 설총의 아우’란다. 따라서 무학대사가 지은 청구비결(讖謠, 일종의 예언으로 ‘정감록’에 있음)에 나오는 대로 의상이 원효의 제자라는 말은 착오가 된다. 신기한 건 그 형인 설총은 동방의 儒宗이 되고 동생인 의상은 동토의 僧祖가 되었다는 기술보다는, 여태껏 학자들은 왜 원효와 의상을 부자로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꼭 이규경의 점잖은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호사가들은 이른바 ‘씨나 배’의 문제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았을까? 이수광의 <芝峯類說>을 펼치면 항간에 혹여 요석공주 말고 다른 연인이 있었다는 추측성 소문이 가능할뿐더러, 김걸이 지은 <海東文獻錄>의 釋家類에 동조하여 의상의 속성이 김(金) 씨라면 만의 하나 아버지가 다른 분일 수도 있지 않나 해서다. 어쨌거나 어느 날 불쑥 나타날지 모를 고문서에서 두 분에 대한 인상착의가 단 한 줄이라도 숨어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개인적 바람일지언정 불경스럽거나 지나친 억측인 걸 모를 리 없다는 점을 차제에 밝혀둔다.


  매우 조심스럽게 짚어볼 대목은 의상과 원효가 택한 길이 달라진 것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원효 큰스님이 오밤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설이야말로 역사성이나 사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세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이끄는 일은 색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데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살을 붙여 가꾸는 협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진상을 안치했다는 설총의 효심은 당대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까? 일본인들이 원효를 위시해 퇴계 이황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조상을 흠모한 연유는 무지몽매한 그들에게 백제의 선진적인 문화에다 유학을 전파한 아직기와 왕인 박사의 공이 크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천자문뿐만 아니라 논어 등 경전까지 배운 왜인들이었건만 어제오늘 경제 좀 일궜다고 저토록 최소한의 은혜조차 모른 채 매사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노라면 왠지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친 것 같아 이제껏 걸어온 길을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1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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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원효를 둘러싼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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