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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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가족행복학교 대표,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가치는 생명이다. 생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도처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이 생명을 잃는 상황을 지켜만 보았던 때가 있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멸하는 생명들을 매일 지켜보았다.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이로 인해 생명의 가치가 급속히 추락하는 추세를 보게 되었다. 근자에 등장한 새 단어 중에 ‘그림자 아이’라는 단어가 있다. 산부인과에서 출생할 때 임시로 부여받은 ‘신생아 번호’만 있을 뿐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사라진 아이들을 가리켜 ‘그림자 아이’라고 부른다. 과연 이 어린 생명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최근 수원에서 친모의 비정한 영아 살해 사건이 있었다. 일명 냉장고에 영아의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다.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둔 친모가 넷째를 출산 후 하루 지나 살해하고 시신을 냉장고에 유기했다. 일 년 후 다시 다섯 번째 아이를 출산 후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 후 냉장고에 유기했다. 경찰은 동일한 두 번의 살해와 유기를 살인죄로 변경해 검찰로 넘겼다. 내가 낳은 자식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 중에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생명을 해치는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안방극장에서도 잔인한 피를 튀기는 혐오스러운 장면이 버젓이 나온다.


‘아가씨’라는 영화에서 어린 소녀를 어릴 적부터 성인의 성적 노리개로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생명의 진로가 애초에 크게 빗나갔다. 또 ‘기생충’은 유명한 영화이지만 운전기사가 파티장에서 자기를 반지하에 사는 냄새 나는 하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주인에게 달려가 가슴에 식도를 꽂는다. 끔찍한 그 장면만 본다면 생명의 가치를 급속히 추락시키고 있다.


‘난징 난징’이라는 중국 영화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난징대학살을 다룬다. 일본의 난징 정복과 30만 명을 대학살하는 장면을 매우 리얼하게 묘사한 흑백영화다.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폐해를 넘어서 생명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일본의 잔학상을 보여준다. 섬뜩하고 음란하고 저급한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요소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강제적으로 생명을 소멸하는 장면에 치가 떨린다.


영화예술은 가장 섬세하게 그 시대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내적, 외적 현상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특히 현실에서 생명의 가치가 어떻게 추락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생명에서 멀어져 간다. 이것이 멸망의 조짐이 아닌가?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헤로디아에게 가져갔던 살로메의 광기가 흐르는 시대.


성경은 생명이 흐르는 언약이다. 에덴에서 빗나간 생명의 행렬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왔다. 그의 사역은 생명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복음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소식이다. 생명을 찾는 일이다. 생명을 주는 것이다.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추락하는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는 복락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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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추락하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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