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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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세르비아(Republic of Serbia, 인구: 약 700만, 면적: 한국의 3/4 남짓)의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밀로셰비치의 카멜레온적 변신과 선동가적 영욕 사이를 재단할 수밖에 없다. 티토 사망 이후 정치적 광폭 행보를 보이던 그가 왜 일순간에 추락했는지에 관해서는 보다 면밀한 분석을 요하겠으나 두루 요직을 거쳐 공산당 당수가 된 뒤 코소보에 사는 세르비아인 저항세력을 규합하는 와중에 일약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데는 타고난 극단적 기질과 대세에 영합하는 지도자적 결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벌인 광란의 질주는 과연 치밀한 상황극일까, 기획된 자살극일까? 우리는 정교회 사제인 그의 친부와 장성인 삼촌, 교사인 모친(열성 공산당원)이 모두 비극적 자살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첨단권력이 행사되는 꼭짓점에서 소용돌이치는 안간힘의 역학관계는 양자물리학 이론에 비해서는 전연 난삽하지 않다. 지난한 과거사를 소환해보면 결정적인 변수는 늘 주의주장을 맴도는 상수보다 유전적 형질을 넘나드는 자유의지에 달려있었다. 필자는 그 경우의 극소수를 신인 양자 간의 영적 교집합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재는 시민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는 ‘칼레메그단 요새’. 박대장은 한사코 오가는 데만 한나절 이상이 소요되는 베오그라드를 이번 일정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이곳을 와보면 발칸이 발끈할 말이다. 오히려 하루를 더 늘리거나 다른 곳을 줄여서라도 사라예보를 집어넣으라는 게 여행자의 호소 어린 진언. 그만치 이른바 하얀 도시는 니콜라 테슬라를 낳은 명소답게 제 몫을 감당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테슬라의 사례는 종잡기 어려운 언행과 기형적 발상으로 인한 공과가 얽혀있어 한마디로 규정할 순 없지만, 특정 관광지를 묘사하면서 거기에 세운 동상이나 기념물을 적당히 나열하는 식의 서술처럼 더이상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그러한 독서물을 읽어보았자 독자의 뇌리에서 이내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보르나 정교회만 해도 그렇다. 그곳이 각 종교가 혼합된 형태여서 독창적이라거나 그래서 여타 종교인들이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식의 피상적 논리에 무작정 동조할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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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비아의 칼레메그단 요새

 

필자의 눈에 비친 세르비아는 보헤미안 거리로 불리는 스카다리야에 확 꽂힌 것도 아니요, 시선이 주도로인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맹연습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지도 않았다. 로마제국 시절 단단한 작업을 거쳐 중세 세르비아왕국을 건설했고, 다뉴브강과 사바강을 끼고 제아무리 오스만제국의 진출을 두 세기 동안이나 막아냈다고 한들 결국에는 저지선이 뚫릴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요체는 늘 중요한 변환기의 태세전환에 매달려있다. 차라리 재래식 대포를 전시하고 지하철 건설이 막힌 유적지를 놔둔 채 당찬 미래를 설계하는 편이 신세대에게는 명약이 되는 법이다.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인생들과 과거사를 붙들고 늘어져 향수에 잠시 젖는다 한들 남는 게 무어랴.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한겨레인 현실감의 한 자락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BTS 노래에 맞춰 댄스연습에 열중하는 무리를 보고는 냉큼 고개를 돌려 흐뭇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응시할 수밖에 없는 한류의 향기를 한껏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다소 딱딱한 느낌의 ‘베오그라드’를 벗어나니 곧장 부드러운 지평선이 나타났다. 대략 30km의 시야에 지형지물이 없어야 지평선이랄 수 있다는 설명은 기실 루마니아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로되 기행문을 총정리하는 마당에 뒤엣것을 좀 앞당겨 쓴들 무슨 나무랄 일이랴. 그 거리감이야말로 필자가 재보는 통밥으로도 감이 잡히는 개념. 곧 우리나라에서는 김제평야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정경이라는 말까지 시비할 일은 아니로되 실제로 가보니 야산이나 동네에 가려 지평을 여는 데도 무리더라는 말이다. 비옥한 땅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길. 갈색 늪지에 이어지는 키 작은 유채꽃밭도 장관이다. 필자는 대지라는 소설용어를 천하를 품은 중국에서도 이처럼 폐부에 와 닿도록 느껴보지는 못했다. 이러한 옥토를 소유하고도 풍부한 곡물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그건 게으른 탓이거나 적절한 농법을 외면한 잘못이라고 보아야 한다. 적어도 드넓은 평야만 두고 보면 프랑스나 영국의 농촌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갛게 녹슨 가드레일이 무슨 대수이고 허름한 철길은 무슨 큰 약점이랴. 매끈한 노면에 이만큼 균형감 있는 국토 개발을 이뤘다면 이제는 쓰레기 무단투기 현장을 바로잡고 난개발의 유혹만 과감히 뿌리치면 되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5호)에는 ‘불가리아: 소피아와 벨리코 투르노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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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다음은 지평선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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