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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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얼핏 은둔의 나라처럼 각인되어있는 알바니아(Republic of Albania, 인구: 280만가량, 면적: 한국의 28% 정도)에 대해서는 쏟아놓을 말들이 수북하다. 박대장은 왜 이 나라를 소개하면서 연신 벙커밖에는 볼거리가 없다고 세뇌하듯 강조했을까? 하지만 막상 필자의 눈에 비친 알바니아에는 예상치만큼 벙커란 게 없었다. 어쩌다가 차창에 스치듯 지나가는 소형 벙커를 가까스로 목도한 소감이란 저 정도 크기나 숫자를 두고 마치 가도 또 가도 큼지막한 벙커와 초대형 벙커와 무지막지한 벙커만이 비좁은 국토를 온통 뒤덮고 있는 양 침까지 튀기며 줄곧 과장해오지 않았는가? 물론 박대장이 지닌 특유의 말투를 이제는 모르는 바 아니요, 매 순간 촌철살인으로 이어지는 그의 재치를 알 만큼 아는 처지이기에 더 의아하다는 말씀이온대,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좀 엄살을 떠는 세 살, 곧 번득이는 익살, 두둑한 뱃살, 비위 좋은 넉살을 인정한다고 해도 상당 부분은 이해가 불가한 노(NO)인정 상태임을 본 지면을 통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마더 테레사 동상이 외로이 서 있는 고지에서 보았던 세 개의 벙커를 짐짓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눈에는 그 조합이 그저 예사로운 일로 비치지 않았다는 고언이다. 해석을 곁들이자면 테레사는 대내외적 이미지 제고를 위한 상징물에 불과한 장치요, 벙커는 전 국토의 요새화를 부르짖은 북한의 통치술을 원용한 전시물이라는 건데, 그토록 어설픈 수법이나 수단이 곧잘 먹히는 까닭은 일견 단순하다. 겨우 배고픔을 면해주는 수위로 지배를 지속하는 한 피지배 대상은 스스로 무력감에 빠져들어 상당 기간 우민화 놀음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게다가 희한한 일은 국제 사회의 이념적 길항(拮抗)이라는 두 축이 구조적으로 탐욕스러운 통치자를 옥죄며 조종하기도 만만치 않다는 현실론에 숨은 그림이 있다. 한쪽은 오불관언이요 다른 한쪽은 수수방관하는 사이 초이성을 가진 집단마저 부지불식간에 속수무책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역설적 상황이 지구촌에서는 종종 통하더라는 목격담이다. 버젓이 공원 같은 공개된 장소에 벙커를 놀이시설처럼 지어놓은 모양새가 전연 이상하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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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의 티라나 중앙공원

 

위 진술이 퍽 예민하다고 해서 버럭 반응할 사안은 아닌 것이 일련의 사건을 곰곰이 재구성해 보자면, 테레사가 받았다는 노벨평화상이 알바니아인들에게 공허한 정신적 포만감은 안겨주었을망정 무슨 실질적 허기를 메워주었는가? 예수를 실패한 인간으로 규정하여 신학박사를 따낸 슈바이처의 경우도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벌인 노력 봉사는 세계인에게는 더없이 숭고하게 받아들여져 행위구원의 물증처럼 자리매김했지만 감춰진 본질은 본인의 영광을 추구한 일회성 실화의 연출이라는 데 심증이 간다. 그것을 뒤집어 당사자를 우상시하면 독재의 민낯이요 독재자의 망발이 되는 참이다. 따라서 마담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이행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파이란 가혹한 채찍이므로 그걸 몸소 때우지 않으려면 피와 땀을 분리하며 삽질을 해대는 수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회일수록 태어날 때부터 할례처럼 몸속에 깊숙이 생목숨을 맡기는 절차를 체계화하는 데 성공한 조직체가 북한이라는 한민족이다. 겉으로 이곳을 보면 제법 번듯한 건물도 올라가고 공화정이라는 설빔을 입혀 나토에도 가입하는 등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줄다리기하는 식이다. 영적으로 여기는 바울이 전도한 곳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일루리곤(Illyricum)이라는 지역이다(로마서 15:19).


그밖에도 보탤 말은 태산이나 제번하고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걸어본 자의 소박한 느낌을 몇 자 끼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스칸데르베그 장군을 기린 광장에 들어서면 도시의 중앙을 차지한 에템베이 모스크를 비롯하여 1800년대에 세웠다는 상징 시계탑이 과객을 맞는다. 한때는 종교 자체를 아편이라며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나 최근 행보를 보면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며 미래지향적 구상을 차분히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발칸반도에서 석유매장량이 두 번째이고 지중해 두러스 항구를 활용하면서도 처녀림과 세계자연유산을 보호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국제 사회에 선보이고 있다. 차창 밖에 비친 농촌은 언뜻 후줄근해 뵈지만 어디든 사악한 지도자를 만나면 속절없이 추락하고 만다. 상생을 도외시한 양극화 현상이 본질을 호도하는 세상에서는 관련 법망을 촘촘히 정비하지 않는 한 기득권층은 눈 가리고 아옹하며 제멋대로 이권을 최대치로 챙기는 법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3호)에는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이어 스코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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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벙커를 만나다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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