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6(일)
 
상관의 시기로 전투에서 지원 없이 패전 “죽음 맞이해”  
 
이대원 장군 묘, 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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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보통의 경우 태어난 곳이나 묘역, 공적을 기록한 신도비 등 다양한 형태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대원(1556∼1587) 장군의 경우는 자신이 태어난 평택을 넘어서, 전라남도 고흥과 여수, 그리고 ‘손죽도(損竹島)’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전투 중 누구 한 목숨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겠지만, 상관의 질투와 시기로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 장군의 생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호에서는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위치한 이대원 장군의 묘와 신도비, 사당인 ‘확충사(䨥忠祠)’를 소개한다.
 
■ 무인의 기질이 다분했던 이대원 장군, 녹도만호로 부임하다
 
 평택에서 태어난 이대원 장군은 어린 시절 효성이 깊고, 학문과 무예의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시기 일반적인 사대부라면 문신으로 과거를 보는데 비해 이대원 장군은 무과에 응시, 급제를 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조선 사회가 무신보다는 문신의 우대가 있고, 올라갈 수 있는 품계 역시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문과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장차 지휘관으로서 역량을 기대해도 좋은 모습이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장수라고 칼만 잘 휘두른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 학문적 소양과 부하들을 다독이는 인품과 호방함 등을 갖추고 있을 때 장수로서의 시너지 효과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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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원 장군의 동상 
 
 훗날 이대원 장군이 남겼다는 절명시를 보면, 장차 나라를 위해 힘을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장군의 이른 죽음이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또한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뒤 왜군의 침입으로 ‘임진왜란(1592)’이 발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렇듯 무과에 급제한 이대원 장군은 선전관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하게 된다. 녹도만호는 품계상 ‘종4품(從四品)’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각도의 진에 배치된 무관이었다. 녹도만호의 경우 고흥군의 녹도진성에 배치되었는데, 아마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녹도만호라고 하면 이대원 장군과 함께 정운(1543~1592)을 들 수 있다. 공교롭게 두 분 모두 왜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했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일까? 이대원 장군의 사당은 전국에 4곳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고흥 쌍충사(雙忠祠)와 여수 영당(影堂)에 함께 배향되어 있다.
 
■ 손죽도 왜변, 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과의 갈등과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
 
 한편 이대원 장군이 녹도만호로 부임할 무렵 조선은 왜구의 출몰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한온장군 충신정문’ 역시 ‘을묘왜변(1555)’ 당시 장흥군수였던 ‘한온(1511~1555)’ 장군이 절도사 원적과 영암군수 이덕견 등과 함께 ‘달량진(達梁鎭)’에서 왜구와 맞서 순절했던 것을 기리는 ‘정문(旌門)’이다. 이대원 장군이 녹도만호로 부임한 뒤에도 여전히 남해안에 왜구가 출몰했고, 이에 장군이 출격해 왜구를 토벌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보고하지 않고, 왜구의 수급을 벤 일로 인해 심암은 이대원 장군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즉 전공을 두고 상관이 부하의 공적을 시기했던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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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확충사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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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확충사 
  
 얼마 뒤 왜구가 이번에는 ‘손죽도(損竹島)’로 쳐들어왔는데, 이때 심암은 이대원 장군에게 왜구의 토벌을 명령했다. 그런데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단 1백명, 누가 봐도 무모한 전투였고, 결국 시기에 눈이 먼 심암은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은 결과 전투에서 패전하게 되고, 이대원 장군 역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경남이 쓴 <남중잡록>을 보면 심암의 행동은 더욱 가관인데, 이대원 장군이 죽은 뒤 거짓 장계를 올려 왜구의 세를 과장해서 보고했다. 그러자 놀란 조정에서는 방어를 위해 ‘신립(申砬)’과 ‘변협(邊協)’을 내려 보내고, 전라남도 각 지역의 방어태세와 진을 점검하는 등 한바탕 소란이 있었는데, 6일이 지나도 왜구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심암이 거짓 장계를 올린 것을 안 조정에서는 심암을 체포한 뒤 목을 효수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그리고 심암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사람이 바로 이순신(1545~1598) 장군이었다.
 
■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소재한 이대원 장군의 묘와 신도비 
 
 이러한 이대원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깊이 인식이 되었는데, 우선 정철의 아들인 정기명은 이대원 장군을 위해 ‘녹도가(鹿島歌)’를 지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 때인 1599년 윤두수는 수군들의 소원에 따라 이대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고, 장군이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한편 이대원 장군이 세상을 떠난 여수 손죽도에는 이대원 장군과 관련한 여러 흔적이 남아 있는데,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와 가묘,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을 보면 손죽도를 ‘손대도(損大島)’라고도 하는데, 이는 죽(竹)을 대(大)로 부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즉 이대원 장군을 손상시킨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름을 다르게 부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도 손죽도에서는 장군의 후손들이 방문해 숭모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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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원 장군의 신도비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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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원 장군의 신도비, 비문은 남구만, 전액은 김진규, 글씨는 조상우가 썼다
 
 이러한 이대원 장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산83-6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이대원 장군의 신도비를 비롯해 사당인 ‘확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의 경우 정3품 이상의 고위 관리인 경우에 세워지는 비석으로, 주로 해당 생애와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장군의 신도비의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전액은 김진규, 글씨는 조상우가 썼으며, 묘와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를 지나면 장군의 동상과 사당인 ‘확충사(䨥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확충사의 이름 유래가 재미있다. 일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침입한 왜적이 사당에 불을 지르자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이야기에 소나기 ‘확(䨥)’을 써서 확충사라 이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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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본 이대원 장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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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원 장군 묘의 묘표
 
 묘역의 경우 특이하게 봉분이 3기인 것이 특징인데, 가운데 이대원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로 부인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석물은 가운데 묘표와 상석이 배치되어 있고,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 1쌍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기록을 찾아보면 장군의 죽음에 대해 애석함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이는 그 만큼 날개를 채 펴지 못한 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던 장군에 대한 애통함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보면 장군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과 이대원 장군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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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손죽도 왜변의 영웅, 이대원 장군의 묘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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