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노란색 이정표, 삶의 이정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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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프랑스 국경을 출발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가는 여정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프랑스 국경에서 산티아고까지는 764km, 피니스테레까지는 852km로 아무리 빨리 걸어도 한 달은 걸어야 하는 고행의 길이다. 김희태 소장의 ‘산티아고 가는 길, 준비 없이 떠나보자!’ 기행문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말>


■ 길을 헤매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산티아고 길을 떠난 지 26일째가 되던 날, 나는 스페인 갈라시아 자치 지역 루고주에 있는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새벽녘에 길을 떠나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를 향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길 위에는 나 혼자뿐, 길을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이정표(里程標)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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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의 등대 역할을 하는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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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토마린(Portomarin)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어 계속 걷기는 했지만 걷는 내내 불안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괜히 일찍 출발했나 싶은 마음과 그냥 남들 따라 갈 걸이라는 생각이 교차 되던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 걸을 때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먼 타지에서 홀로 걷고 있는데, 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내면의 불안감과 싸우며 걷다가 이정표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과 기쁨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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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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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올베이로아(Olveiroa)를 길을 떠나다.

 

비슷한 일은 31일째에도 있었다. 이날도 새벽녘에 일찍 네그레이라(Negreira)를 출발해 올베이로아(Olveiroa)로 가는 길이었다. 안개가 자욱이 낀 날씨였는데, 어느 마을을 지날 때 갈림길이 나왔다. 그런데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오른쪽 방향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조금 가다 보니 바닥에 표식 같은 것이 있어 당연히 이 길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길이 없으니 가지 말라는 표식이었던 듯싶다. 내려가다 보니 뒤에 오던 외국인 순례자 3명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아 설마 했는데, 아뿔싸! 내려가 보니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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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만난 순례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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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시아 자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정표, 이전과 달리 독특한 형태의 십자가 문양이 특징이다.

 

그제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올라가는 데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조금 전 갈림길로 돌아와 자세히 보니 주택 벽면에 왼쪽으로 가라는 표시가 있었다. 이제야 눈에 보인 이정표에 허탈해하고 있을 때 인기척 소리에 창문이 열리면서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바라보더니, 왼쪽으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올베이로아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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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베이로아로 가는 길에서 본 풍경, 해당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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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 산티아고 길에서, 삶의 이정표를 생각하다.


위의 사례는 내게 이정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잘 되어 있어 덜 하지만 과거에는 다른 지역을 가기 위해선 지도와 이정표를 많이 의지했다. 모르는 길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기에 그렇게 만난 이정표는 내게 단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길과 이정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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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럼통에 그려진 노란색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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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길을 걷다 마주한 이정표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노란색 이정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이정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산타아고까지 갈 수 있기에 길을 잃을까 염려하지 않고,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다. 나 역시 홀로 걷는 입장에서 이정표의 존재는 큰 위안이 되었다. 물론 위의 사례처럼 길을 헤맨 경우도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큰 어려움 없이 산티아고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또한,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각 지역마다 이정표가 조금씩 다른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이정표의 존재로 인해 내가 어느 지역에 왔는지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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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비로 표시한 노란색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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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 이정표를 따라 걸었던 산티아고 가는 길, 이정표와 함께 잠시 쉼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문득 길을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이정표는 내게 훌륭한 지침 역할을 했다. 반면 내 인생이라는 길을 두고 봤을 때 이정표가 없었던 것이 아쉽긴 해도 결과적으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정표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정표가 없어 헤맬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은 다시 찾아 돌아오면 되는 것이고, 과정이야 둘러 가더라도 결과적으로 목적지에 잘 도착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니 막연한 미래를 위하기보다 매 순간을 즐기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어쩌면 산티아고 가는 길이 내게 준 교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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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노란색 이정표를 따라 걷는 산티아고 가는 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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