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헤라클리우스,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 당대의 악몽 ‘포카스’ 비참한 죽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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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비잔티움 제국으로 더 유명한 동로마 제국은 지리적으로 서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사이에 있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에 의해 로마에서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현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유명한 난공불락의 삼중성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해협을 기점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었다. 이러한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경쟁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유럽의 역사에 있어 비잔티움 제국은 투르푸아티에 전투(732)와 함께 이슬람 세력의 유럽 진출을 막아낸 일종의 방파제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필연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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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세미시스 금화 <사진 제공 최현준>


비잔티움의 초기 역사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옛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7~565) 시기 지금의 북아프리카 지역인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동고트왕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스페인 남부 일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인 성공과는 달리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제국은 너무 많은 돈을 써 국고의 손실을 초래했고, 이는 유스티누스 2세(재위 565~578)가 즉위하며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당시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서진과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등으로 영토의 손실을 가져왔고, 티베리우스 2세(재위 574~582) 때는 세금 감면과 사치 등 제국의 국고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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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플 여신을 의인화 한 동전. City Commemorative AE follis

 

이러한 때에 마우리키우스(재위 582~602)가 즉위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냈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내분을 이용해 아르메니아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마우리키우스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돈이었다. 비어있는 국고를 물려받았던 마우리키우스는 긴축 재정을 실시했는데, 이는 시민과 군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 결과 불만을 품은 군인들은 포카스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고, 시민들 역시 인기가 바닥이었던 마우리키우스를 버리고 반란 세력에 동조했다. 결국 반란군에 붙잡힌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아들들은 참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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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를 기념해 발행한 동전, 로마의 건국 신화가 새겨져 있다. City Commemorative AE3(wolf and twins) 

 

반란에 성공한 포카스(재위 602~610)는 황제가 되었지만 시민들은 이내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여러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가운데 포카스는 단연 최악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의 영토는 줄어 갔으며, 내전으로 국력이 소진되어갔다. 내부적으로 거듭된 숙청과 내전으로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인 제국,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인물이 등장하게 되니 이가 바로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재위 610~641)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고, 포카스가 그의 발아래 끌려왔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를 보면 이때의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헤라클리우스가 물었다. “그대가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그러자 포카스가 대답했다.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당대의 악몽으로 기억될 포카스는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은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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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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