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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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어제 슬픈 소식을 접했다. 집안 조카뻘 되는 40대 중반 가장이 과로로 쓰러져 두 주간을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가족들이 자원해 장기기증을 결정하고 장기이식 수술실로 들어갔다. 

 

무려 7시간에 걸쳐 장기들을 이식하는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이 헌신으로 여러 명의 환자가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내부의 장기가 더 손상되기 전에 급히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말을 듣고 어머니와 아내, 형제가 동의해서 급하게 진행이 되었다.


어떻게 46세 나이에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고인은 책임감이 강해서 회사를 위해 초과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야근이 계속되고 쉴 틈이 없었다. 회사가 신생 회사여서 일이 산적해 있었다. 그래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장례식장에 모여온 젊은 동료 직원들이 애통해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워낙 발로 뛰는 업무가 많아 거래처의 애도를 표하는 조문과 조화가 끝이 없었다. 직장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한 것이 잘한 일인지 유족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삶을 이렇게 살다가 일찍 중도 하차하는 걸 지켜보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스스로 본인이 선택한 것인지, 강요받는 사회 시스템에 끌려가는 수밖에 없는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이 자신을 과로하는 삶으로 내몰았을까?


하지만 또 다른 삶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예를 들자면 서울 신당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는 전 직장 동료를 개인의 사감으로 스토킹을 하고 결국 찾아가 계획적으로 살해를 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억울하고 비통한 사건이다. 그 유가족의 눈물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역사 여성 화장실 앞에 헌화한 시민들의 심정도 유가족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가해자는 어찌해 이런 참담한 일을 저질러야 했을까? 사연은 있겠지만 천하보다 고귀한 한 생명을 해칠만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자기 삶을 이렇게 살기로 작정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삶을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일이 아닌가?


또 비슷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린 10대 소녀들을 교묘하게 미혹해서 음란한 영상을 찍게 하고 그것을 유포하는 행위는 악마적이다. 그것을 유통하거나 받아서 즐기는 자들도 이미 삶을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최근 드라마 수리남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가상현실을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드라마 배경이 된 수리남이라는 작은 국가가 발끈하지 않겠는가? 마약왕을 더 흉악스럽게 만들기 위해 사이비 교회 목사로 가장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해 군인까지 동원하는 한국인 마약왕은 괴물이었다.


드라마 상의 인물 같지만 현실 속에도 마약을 가까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따라가는 것이다. 법망과 검사대를 벗어난 어둠 속의 거래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마약으로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마약이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황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삶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곁에는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선한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도 있다는 말이다.


실례를 들자면 최근에 주변에서 가슴으로 자식을 낳은 부모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70대를 살아가고 있는 친구는 거의 40년 전에 가슴으로 아들을 낳았다. 위로 딸이 하나 있었지만 젊은 부부는 둘째를 가슴으로 낳아 한 생명을 정성을 다해 키웠다. 때로는 힘든 고비가 있었지만 잘 견디며 헤쳐 나왔다. 이렇게 사람으로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듯 이름 없는 기부 천사 소식을 기다린다. 그는 거액의 기부금을 지역 행정타운 사무실 앞 꽃밭에 두고 간다. 지폐와 함께 저금통을 깬 동전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걸 보며 우린 사람으로 사는 또 다른 모습에 흠뻑 젖어든다. 얼마나 선한 열정인가?


그뿐이 아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폐지와 폐박스를 주워 리어카로 끌고 가는 어르신을 볼 수 있다. 생계를 위해 그 일을 하는 분도 있지만 그 일의 수입으로 장학금을 내거나 그렇게 일생 동안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금으로 내는 어르신들을 본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한 시대의 양심이요 선한 의지의 승리자들이다. 이렇게 삶을 살려고 작정한 것이다.


6.25전쟁 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 청년 음악가들이 자청하여 위문단을 만들어 전방을 돌며 클래식과 우리 가곡을 들려준 감명적인 실화가 있다. 그들이 전방에서 공연을 할 때 적진에서도 박수가 들려왔다고 한다.(KBS FM 클래식 방송에서 청취함)


이렇게 사람으로 살려는 의지가 아직 이 세상을 제대로 굴러가게 한다. 착하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오늘도 가정과 직장에서, 전방과 후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자로 혹은 평화유지군으로, 산업 전사로 국내와 세계를 누빈다. 바로 이런 자들로 인해 세상은 건재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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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삶, 사람으로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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