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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사는 이야기]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태초의 축복을 방기하다’ (1회)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신묘막측한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태초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주제는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조주께서 최초의 인간 부부를 위해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선물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삼위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고,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시며 다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당부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하와하고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차례로 죄를 짓는 장면과 하나님의 추궁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아담은 학습 과정조차 생략한 채 각 생물들의 이름을 지을 만큼 총명했으며, 돕는 배필로서의 하와는 흙이 아닌 본차이나로 만들어졌지만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자범죄의 결과는 지상낙원에서의 추방이었습니다. 위에서 눈에 띄는 의문점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애초에 사람이 죄를 짓도록 설계하셨느냐는 것과 왜 남자는 흙으로 만드시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오게 하셨느냐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산 중앙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따 먹게 하신 의도는 무엇이며, 처음부터 남녀를 동시에 만들지 않으시고 굳이 시차를 두어 창조하셨느냐는 의문도 듭니다. 물론 근원적으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잘못으로 말미암아 자자손손 원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상황은 너무 가혹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손을 대지 않을 것으로 가정하고 그렇게 정하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왜 꼭 그래야 하셨는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어찌 보면 그토록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로 인해 호사가들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평택시 대추리길에 피어있는 옥잠화 또한 뱀으로 둔갑한 채 슬그머니 정체를 드러낸 사탄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옵션은 처음부터 말씀도 안 꺼내셨잖아요? 이렇게 엄청난 괴물이라면 여러 번 설명하시고 사악한 영물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극히 조심하라고 다짐을 받았어야죠. 이건 일종의 계약 위반 아닌가요? 그것이 저희로서는 못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못된 존재를 내버려 두시고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도전장을 내민 귀신들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건가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하와가 속아 넘어간 것도 어리석지만, 남편으로서 중심을 잡아야 할 아담의 태도는 또 뭡니까? 가장으로서 줏대가 없이 행동했다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하와가 사탄과 말을 주고받을 때부터 단호히 대처하지 못한 잘못이 크다는 겁니다. 옆에서 방관하다가 방조하듯 부화뇌동했잖아요. 두고두고 아숩고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둘 따지고 보면 겁도 없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을 보태지를 않나, 죽을까 하노라 했다고 흐리멍덩하게 반응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간교한 마귀의 수법이란 게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확실한 내용을 흐트러뜨려 흐릿하게 만들잖아요. 하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에게 정확히 전했는지도 의문이긴 합니다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이제 수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처도 가관이었죠. 일단 죄성이 온몸을 제어하니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긴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실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지은 죄를 추궁하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그 여자 때문이라고 가당찮은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에 뒤질세라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둘러댑니다. 하루아침에 마귀의 종노릇하는 모양새로 전락해버린 꼴이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세상의 숨길 수 없는 실상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9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천상의 계시를 의심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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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6-30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천변을 가로지른 산책’ (하)
    아닌 게 아니라 겉모양만 보면 누구라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요컨대 ‘청계8경’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이러했다. ‘청계광장’을 지나 ‘광통교’에서 벽에 새긴 ‘정조반차도’를 감상하고 나니 문화의 벽에 펼쳐놓은 ‘패션광장’이 우리 부부를 맞는다. 추억어린 ‘빨래터’를 뒤로하고 2만여 시민이 동참한 ‘소망의 벽’에 이르러 하늘물터에 세운 ‘존치교각과 터널분수’를 보노라면 그 기교와 정성이 가히 놀랄 만하다. 그러나 정작 내 눈을 사로잡은 곳은 ‘버들습지’. 모름지기 천변풍경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인파에 섞여 징검다리를 건너다 마주친 송사리 떼와의 만남이 이를 오차 없이 증명했다. 그밖에 귀여운 분수를 보는 맛도 심심찮았고, 샛강과의 조우 또한 즐거웠다. 상주인구 천만을 헤아리는 거대 도심에서 이만한 산책길을 걷기는 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서둘러 인공하천으로 복원한 이유였으리라. 듣자니 하버드대학교 부동산학과에서 이곳 사례를 연구과목으로 개설했단다. 다만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는 분명해 보이나 다소 과장한 듯한 찬사는 여기까지. 이제 곰곰이 왜 자연 하천을 조성할 수는 없었는지 차례로 따져볼 일이다. 차제에 이따금 옛 고향에 출몰하는 슈퍼 쥐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추적할 대목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줄잡아 7~8Km는 넉넉히 걸은 것 같았다. 약 두 시간여 2년 3개월(2003.7.~2005.9.)에 걸친 대역사의 현장을 밟아온 참. 하긴 청계천 복원을 마친 직후에는 매스컴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명물이라는 호평 일색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방문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을뿐더러 여러 나라에서 필수 관광 상품으로 꼽는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언뜻 더없이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난공사 현장에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숨은 희생자와 공로자들이 있었다. 그에 더해 오랜 기간 이곳을 터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소시민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흔쾌한 협조가 없었던들 이처럼 빠른 기일에 완공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하지만 수많은 상인들에게 약속한 갖가지 경제 대책은 일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자살자가 속출했고 아직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어찌 되었든 청계천은 야경이 장관이라는데 밤늦게까지 남아 죄다 보고 갈 수는 없었다. ▲ 청계천 <출처 = 성동구청 홈페이지> 천변 벽면의 검은 돌판에 새긴 깨알 같은 명단이 보였다. 청계천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헤아리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잘난 시장을 빼고는 모두가 가나다순. 이 또한 긍정적인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대변하는 일면인 데다가 새삼 설계자의 미래지향적 마인드가 돋보인 연출이니까. 막바지에 들른 청계천문화관. 청계천 주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기념관이었다. 친절한 도우미에게 상세한 안내를 받으며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川邊風景)’의 줄거리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발표한 장편소설로 50개의 절로 나눠 70여 명의 등장인물이 펼치는 파노라마인데, 일제 중산층과 소시민의 생활 모습을 그린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세태소설이라는 요점을 간추려 다뤄주었다. 저만치 못내 미련이 남은 ‘서울숲’일랑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다리가 몹시 아프기도 했으나 너무 늦은 시각에 퇴근하는 무리에 뒤섞인 채 귀가하기는 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보고 가려던 황학동시장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곧잘 안다고 장담하던 아내마저 뇌리에서 까맣게 멀어진 줄을 알아차리지 못한 터. 그 언저리를 맴돌다가 그냥 돌아서려니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상왕십리역사를 찾았고 국철을 이용해 천안행 급행이 서는 역에 내렸다. 그나마 남은 먹거리가 있어 출출한 기운을 달래준 건 퍽 다행한 일. 단팥빵이랑 귤이랑 남은 계란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서울에 오면 도심이든 지하철역이든 하등 주위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극히 서민적이면서 한편 서구적이랄까. 어디서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는 늘 소중하다. 열차가 출발하고 고대 빈자리가 생겨 눈을 붙이니 어느새 낯익은 시가지. 택시를 타고 아파트 현관에 내린 시각은 저녁 7시경이었다. 당신과의 외출은 늘 행복하다는 지어미의 입말에 달떠 지아비 손으로 차린 저녁 밥상. 아침에 먹다 남은 북어 무국이 언 속을 풀어주었다. 서울에서 묻은 미세먼지를 깨끗이 씻어내고 감사예배를 드린 뒤 잠자리에 누우니 오늘따라 보금자리가 한결 보드랍고 아늑하구나.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8호)에는 ‘에덴동산에 숨은 비밀 - 태초의 축복을 방기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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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6-23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허파와 같은 용산공원’ (중)
    정리하면 계산상 약 9만여 평의 대지에 연면적(延面積)이 그 40%를 넘는다니 한나절 만에 샅샅이 돌아볼 수는 없었다. 응당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선인의 정신이 깃든 문화유물을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면 자주 오는 수밖에. 하긴 내게 이렇다 할 역사적 식견이랄 게 없으니 애초에 상식 수준에서 가볍게 일별해볼 심산이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맘속 깊이 새겨둘 만한 보배가 딱히 짚이지 않아 씁쓸했다. 두리번거리던 고개를 냉큼 돌려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웠기에 텅 빈 공간을 채울 만한 뭔가가 절실했다. 차분히 살펴보니 눈길이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남달리 아는 바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옛 돌탑을 볼 때면 자꾸만 시선이 머무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잠자는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소외된 지점에 입각해 전국에 난립한 군소 박물관들의 운영 전반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기준을 마련할 때라고 본다. 마치 명승지나 관광지 어디를 가나 똑같은 기념품을 닮아가서는 곤란하다는 고언이다. 육중한 덩치의 박물관을 나와 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틈날 때마다 장외교육을 권장하는 입장에서 혹여 한둘이라도 스칠까 기대했던 제자들의 자취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바쁜 수험생들의 현주소를 애써 외면한 참이다. 그때 남산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인공호수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긴 다음 각종 석탑으로 장식한 뜰을 지나 ‘용산가족공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산뜻한 산책로. 푸르른 잔디가 싱그러웠다. 단 정겨운 우리 금잔디는 아니었다. 잔디가 햇살에 반짝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원래는 미8군 골프장이었단다. 부디 인간의 발길에 사라지지 않고 잘 자라나야 할 텐데. 어쨌거나 흔치 않은 풍광. 작은 연못에 오리가 노닐고 조각품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냈다. 현장학습을 나온 유치원생들이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하지만 거대한 서울의 천만 시민들이 맘껏 쉬기엔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다. 머잖아 주한미군 부대가 거지반 옮겨가면 그 전역을 도시공원으로 꾸민다니 기대치가 크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자연친화형 생태공원으로 거듭나기를 학수고대해 마지않는다. ▲ 서울에 소재한 용산가족공원 둔덕에 자리한 태극기공원에 뜬금없이 초병이 서있었다. 바로 옆 담장 너머에 미군 막사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던 터. 모쪼록 이 기지마저 통째로 이전한다면 서울시민을 살리는 허파의 기능은 보다 건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부부가 사는 평택지역이 주한미군의 총 집결지렷다. 대신 정부에서 특별법을 정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특별교부금으로 힘껏 달랜다고는 해도 자신이 사는 곳이 군사기지화하는 걸 달갑게 여길 시민은 드물다. 그로 인해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는 현실을 코앞에서 목도하는 자로서 민족 분단의 처지를 마냥 슬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어디론가 밀려나야 하는 농민들의 처지를 보노라면 적잖이 딱하고, 신도시가 생겨 기존 도심이 정비되면 교육여건이 나아진다는 말에 뭐라고 선뜻 의견을 낼 형편도 아닌 듯하다. 이왕지사 미군 주둔이 필요악이라면 중지를 모아 풀어갈 현안이기에 뾰족한 수는 없지 싶다. 그래서일까?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갑자기 쌀쌀하게 다가왔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아내가 안쓰러워 일단 양지바른 곳을 찾아 나섰다. 삶은 달걀과 과일로 허기를 메우고 나니 냉기도 조금은 덜했다. 시계를 보니 다음 행선지로 향할 시각. 서둘러 일어나 발길을 재촉했다. 종각역에서 내리니 곧바로 영풍문고. 국내 2위 업체라지만 바로 옆 교보문고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잠시 둘러본 뒤 옥빛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청계천의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쪽에는 정부의 농산물 개방을 반대하는 대형버스 행렬이 세종로를 가로막아 섰다. 이름도 낯선 시점광장. 천변을 축약한 물줄기가 과거와 현재를 담아 미래를 향해 상징처럼 흐르고 있다. 비록 자연 하천은 아닐지언정 설계는 퍽 예술 지향적이다. 벽천을 타고 내리는 폭포를 따라 들뜬 기분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간 복개한 이래 시궁창에 불과했던 걸 감안한다면 이만치 맑은 개천을 만든 것에 대해선 점수를 후히 주고 싶다. 버들강아지에 물풀이며 갈대에 담쟁이덩굴이라니 놀랍기 그지없다. 게다가 어제와 오늘을 교묘히 조합해 놓은 발상도 찬사를 베풀 만하다. 적어도 나의 첫인상은 그랬다. 예기치 않게 불거진 여러 문제점을 애써 차치하고서 청계천의 가까운 장래를 접어놓고 보자면 결단력 있는 시도로 보아도 무방할 듯해서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7호)에는 ‘서울 나들이 - 천변을 가로지른 산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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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6-16
  • [세상사는 이야기] 서울 나들이 ‘박물관과 녹지의 만남’ (상)
    벼르고 벼른 끝의 서울 나들이. 다소 늦은 아침나절, 지하철 출근 인파를 피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의 주제는 중앙박물관 관람 및 공원과 천변 산책. 마을버스에서 전철로 연계한 요금 체계의 혜택이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간 지근거리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가 목하 서울로 가는 새로운 교통편을 체득할 기회를 잡은 셈이다. 실제 피부에 와 닿은 승차감도 꽤 괜찮았다. 때가 때인지라 얼마큼 예상은 했으나 의외다 싶을 만치 승객이 적었다. 하지만 수원에 이르니 상황은 정반대. 순식간에 북적이는 차창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게다가 벌써 오래전이로되 탈서울 뒤 해마다 몇 차례씩 향경(向京)할 때면 새삼 언짢아지는 게 있었다. 우리네 차창 풍경은 왜 이 모양일까? 굳이 희뿌연 하늘을 뒤덮은 아파트단지를 실례로 들지 않더라도 푸른 산맥을 뭉개고 중구난방으로 지어댄 건물들을 보면 심란하다. 난개발에서 주요인을 찾을 수 있겠다. 지금이라도 풍광과 어울리는 지붕 형태를 디자인하고 벽면 색깔만 통일해도 웬만한 그림은 나올 듯한데 왜들 미적거리는지? 혹여 경제선진국 진입에 걸맞은 문제 제기는커녕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은다면 볼썽사나운 대한민국의 풍경화를 확연히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연신 나타나는 후줄근한 상가 및 주택가. 너저분하고 지저분한 구석도 이따금 끼어든다. 대략 한 시간 반 만에 이촌역에 내리니 ‘국립중앙박물관’. 1909년 11월 창경궁 안에 이왕가박물관으로 개관한 이래 1915년 12월 총독부박물관을 거쳐 해방 후 1945년 12월 독립 박물관이 되었다가 몇 군데를 오가며 전전한 끝에 2005년 10월 28일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고 드디어 용산시대를 열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건물의 격조를 높여주리라 기대했던 외양과는 거리가 멀다. 이왕이면 전통 한옥의 우아한 자태를 살려 지었으면 좋으련만, 신축한 건조물의 겉모양은 아무리 뜯어본들 별다른 의미조차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어정쩡했다. 덩치로만 친다면야 세계 여섯 번째 규모라지만 그 위용마저 별로인 터에 다행히 시멘트에서 풍기는 칙칙함을 주위의 섬세한 조경이 조금은 감싸주었다. 다만 유독 공공장소에만 오면 흐트러지는 무질서의 고질병. 왜일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로 붐비는 건 반가운 일임에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모양새를 참아내지 못하는 건 나의 못된 성정 탓일 게다. ▲ 국립중앙박물관 외경 1층 상설 전시장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해지기 전까지 둘러볼 빡빡한 일정이 핑계였다. 압권은 중앙에 자리한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개인적으로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박물관다운 전시물로 여겨졌다. 첫 전시관은 고고관. 그런데 입구에 걸어놓은 연표의 좌우가 뒤바뀌어 있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동선을 거슬러 거꾸로 들어왔으니 시선을 역으로 돌리는 불편함쯤은 감수하란다. 아무튼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를 거쳐 원삼국부터 신라시대까지 일사천리로 훑고 지나갔다. 평소 궁금해하던 발해는 바로 옆 역사관에 있었다. 거기서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금석문실과 한글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상정고금예문의 우수성과 우리 한글의 탁월함은 변함없이 빛났다. 2층의 미술관에서는 서예실이 눈에 띄었고, 3층 회화실에서는 도자보다 금속공예에 눈길이 갔다. 아시아관에서는 단장을 마친 인도네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낙랑유적과 신안해저유물이 관람객을 모았다. 잠시 앉아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쉬다가 발길을 옮기니 기증 유물들의 배치는 일목요연하지가 않았다. 그 가운데 걸음을 멈춘 곳은 일본인에게서 되돌아온 수집품들. 하나하나 살펴보니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형식보다 내용물에 녹아있다. 총 33만 점의 국보급 유물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비해 전시물이 빈약해 뵈는 건 나만의 시각일까? 매사 외식(外飾)을 경계하라는 선현의 가르침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 아내 역시 그리 탐탁한 눈빛은 아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배치도라면 그야말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와 견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제 물건인 양 으스대는 꼴불견보다는 문화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떳떳이 지키는 일이 몇 갑절 가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간송 전형필 선생이 그립다. 그처럼 해외를 떠도는 골동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일에 정책 당국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나아가 실력 있는 큐레이터를 양성하고 편리한 부대시설과 주변 경관의 조성 등에도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6호)에는 ‘서울 나들이 - 허파와 같은 용산공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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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9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겨울’ (4회)
    벌써 때 이른 첫눈이 내렸습니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러구러 어느덧 올해도 다 지나갑니다. 겨울 편지에서는 “인간의 원죄”에 대하여 깊숙이 들여다보렵니다. 아시다시피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적에는 죄가 없었지요.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각종 실과를 따먹으며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하신 피조물이었으니까요. 아담은 영특했고 한동안 본분에 충실했습니다. 온갖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줄 정도(창 2:19)였어요.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지상의 어느 학자도 그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잖아요.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십분 활용한 결과였습니다. 아름다운 에덴동산은 한동안 그렇게 지극히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이라고 좋아하던 하와 앞에 뱀의 형상으로 둔갑한 사탄이 나타납니다. 코앞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범하라고 유혹했어요. 물론 간교하게 포장한 거짓말(창세기 3:1~6)이었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창세기 2:17)을 불행히도 최초의 부부는 어기고 맙니다. 그 대가는 영적 죽음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 속이고 감추는 짓은 일상이 되었지요. 가당찮은 핑계를 대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창세기 2:17)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터입니다. 자범죄로 인해 죄인이 된 게 아니라 이미 죄로 물든 죄인(시편 51:5)인고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삼위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심으로써 우리의 죄 짐을 지고 돌아가셨기에 구원을 받은 현장이 생생히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감읍하게도 생령으로 지으셨기게 자유의지를 선물하셨습니다. 매일 죽어야 한다(고린도전서 15:31)는 과제를 주신 참이죠. 자유의지는 온전히 내게 맡기신 권한이니까요. 착오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해서 당장 무슨 징계가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전능자의 은혜를 오용하며 살지요. 엄연한 창조 사역을 믿지 않을지라도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로마서 8:26)하시며 마침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큰 사랑을 모르는 건 뿌리 깊은 불신앙 때문이지요. 죄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자신의 잘못이 보일 리 없으니까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의 약속을 받은 성도보다 더 행복한 일생은 없습니다. 가까이 상생 정신을 실천할 공동체에서 싸움이 계속되는 원인은 자명합니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 때문입니다.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도킨스의 주장과는 세계관이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범죄의 속성이 고스란히 자자손손 유전된 참이니까요. 불순종의 인자가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 형국입니다. 감히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한 죄악이지요. 인간은 높아지면 반드시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유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소명에 쓰고 나면 그 얼굴을 주님의 옷자락에 깊숙이 감춰야 하거든요. 물거품 같은 공명심에 연연하다가 형편없이 추락한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바울의 고백(고린도전서 3:6-7)을 마음 판에 새기십시오. 사람은 참으로 미약한 존재여서 자기애를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굳이 상처의 원인을 찾는다면 영적인 질환이 첫째요, 육적인 환부는 태만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백날 말씀을 듣고 읽어도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으시니까요(시편 66:18).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우미 역을 자임할 여건을 마련할 의무가 본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인간사가 서로의 필요는 주고받는 법칙을 벗어나기 어렵거든요. 상대가 장애를 가졌다면 더욱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 지레 선심을 쓰듯 말하고 행동하면 곤란합니다. 느긋이 기다려주며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돕는다면 감정을 상할 뿐이지요. 이해와 배려를 통해 서로 사랑할 때 오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해 주님께 하듯 진심을 다하는 게 복음입니다. 소외된 분들이 이룬 공동체를 힘써 돕되 우리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야고보서 4:14)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5호)에는 ‘서울 나들이 - 박물관과 녹지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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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7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가을’ (3회)
    한여름 맹위를 떨친 불볕더위에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그래도 입에 들어올 알곡이며 열매를 이만치 허락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번에는 ‘십계명’을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지요. 험난한 생활 현장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올곧게 살아가는 길이 녹록지 않기에 우리는 더욱 말씀을 궂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사람은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상급 학력을 쌓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온통 일류대학을 나오기 위해 전쟁과 같은 입시를 치러내는 일에 몰두하지만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배우는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드러내는 데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세계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각 학과목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의 구성 원리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글의 음운 체계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합니다. 자음(닿소리)과 모음(홀소리)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참으로 오묘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그 주역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입니다. 자음은 발음기관(혀, 입술, 이, 목구멍)을 본떠 초성과 종성을 만들었고, 모음은 우주의 주요소인 천지인(天地人)을 본떠 중성을 이룸으로써 생생한 소리글자를 생성해냈습니다. 세계에서 현재 사용하는 수천의 언어 가운데 육하원칙에 답할 만큼 창제원리가 분명한 문자는 한글뿐입니다. 유엔에서 해마다 문맹 퇴치에 기여한 단체나 개인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이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인 것만 보아도 그 위상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훌륭한 리더를 중심으로 이뤄낸 걸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촐한 글을 써서 발표하는 문인으로서 우리말을 쓸 때마다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지반 자생적이로되 외국어도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구상에 익혀야 할 언어가 여럿이어서 누리는 이점도 있긴 합니다. 수많은 일자리가 생긴 터입니다. 까다로운 언어 습득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이 누리는 복락이지요. 에덴에서 하나였던 말이 갈라진 까닭은 이렇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회개를 통해 거듭난 줄 알았던 인간들은 끈질긴 원죄의 사슬을 끊지 못한 채 불과 얼마 가지 않아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릅니다. 곧 바벨탑 프로젝트였지요.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을 불신했기에 대대로 거처할 성을 하늘 높이 쌓아 심판을 피해 보자는 심산이었지요. 너나없이 피해망상증에 걸린 영적 중증 환자였던 셈입니다. 차후에는 불 심판을 예고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현재 영어 공부에 매달려 골머리를 앓는 원인이지요. 분명히 기억할 일은 우리가 천국에 가면 태초 주셨던 하나의 언어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수학의 세계는 더욱 논리가 정연합니다. 예컨대 복잡다단한 방정식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을 발견하는 훈련과정이 수학이니까요. 창조 법칙을 찾아보라는 퀴즈요 보물찾기입니다. 자연과학이나 응용과학도 같은 줄기입니다. 이를테면 제아무리 위대한 수학자라고 해도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겉핥기로 하나둘 찾아낼 때마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기뻐 날뛰는 모양새지요. 그 가운데 가장 신묘막측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직 전능자를 만나지 못한 유명 의사나 과학자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 뛰어난 머리로 평생 인체를 연구하고 우주를 탐구하면서도 모든 게 저절로 생겨났다고 우기니 말입니다. 이른바 ‘우연과 추정’을 남발하며 ‘오랜 세월’을 무기 삼아 무작정 버티자는 형국이지요. 온갖 보화의 원천은 삼위의 하나님밖에는 안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예체능 과목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로 응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비행기 속도의 약 두 배의 시속)으로 인해 낮과 밤이 생기고, 지구의 공전(자전의 약 64배의 시속)으로 인해 사계가 바뀌는 걸 보십시오. 게놈(genome)이란 게 무엇입니까? 초월자에 의한 사람의 설계도 아님니까? 눈앞에서 창조주의 사역을 확인하고도 믿지 못하는 바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탓입니다. 시와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는 까닭은 바로 창조세계를 올바로 알아나가기 위해서지요. 전 과목을 다 잘할 수는 없되 보다 흥미로운 분야를 찾아 선하게 활용하도록 도울 책무가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막중한 사명이요 사역입니다. 만만찮은 조건을 극복하고 창조주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에 매진하시길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4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겨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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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여름’ (2회)
    지난해 화덕을 방불한 땡볕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심란해집니다. 사실 사계절이 인체에 미치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돌이켜보면 이게 다 에덴에서 저지른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았지요. 게다가 노아 시대 관영한 죄악으로 인해 홍수 심판까지 자초했으니까요. 미증유의 대사건을 겪은 뒤에는 어떠했나요? 뼈저린 회개는커녕 온갖 탐욕으로 얼룩진 삶이었잖아요. 극심한 지구온난화야말로 그 증거랍니다. 그나마 일반은총으로 살 만하던 세상이 이토록 각박해져 버렸습니다. 다소 무거운 얘기로 마음 카페의 여름을 연 만큼 이번 편지에서는 특별계시인 “십계명”에 관해 살펴보렵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법이니까요.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은 속박이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율법이라면 자유의지를 억압한다는 선입견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축복의 길이요, 어기면 환난의 연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죄를 지었거든요. 그간 창조주의 말씀을 무시한 만용을 곰곰이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십계명은 크게 신을 향한 4개의 ‘대신 계명’과 사람에 대한 6개의 ‘대인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삼위의 하나님은 천지에 유일하신 분입니다. 교주를 섬기는 세상의 종교들은 단지 그 형태를 띠고 유혹할 뿐이지요. 잡신과 교리와 신도를 갖추고 말입니다. 참고로 석가모니 역시 사람이었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지요. 사도행전 4:12절을 통해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니까요.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내친김에 천주교 십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저들은 제2계명을 아예 없애버린 뒤 엉뚱하게 제10계명을 둘로 쪼갰습니다. 9번째에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10번째에 ‘남의 재물을 탐치 말라’로 명시했더군요. 마리아에게 절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감행한 거죠.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뤄진 성경에 칼질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복자로 세우고 성인으로 추앙하며 각종 성물을 만들어 복을 비는 행위는 단지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셋째 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교계에서 파악한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참칭하는 자들의 숫자가 무려 1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옥의 무서움을 모르고 벌이는 망발이지요. 무심코 하나님께 서원하는 일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조주께서 엿새를 일하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부터는 인간사회에 필요한 법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단 주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벗어난 길에 동조하면 함께 망합니다.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법이지요.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품는 음심마저 나무라셨지요. 여덟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마땅히 공적인 물건을 사적인 데 사용하는 관행마저 삼가야죠. 아홉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다들 체감하듯이 거짓말은 순식간에 번지니까요. 열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덧붙일 말이 궁색한 대목으로 눈엣가시 같은 사람을 내 몸과 같이 품으라는 경계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3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가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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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5-12
  • [세상사는 이야기]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선한 마음의 봄날’ (1회)
    때 이른 봄꽃들이 이제 막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싹을 틔웠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번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가리킵니다. 행함은 그 믿음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실천하는 힘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즉 보혜사(保惠師)를 말합니다. 창조주는 세 분이지만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낱말 앞뒤에 ‘갓-’ 또는 ‘-의 신’을 붙여 부르는 유행은 심히 우려스러운 풍조입니다. 성삼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문제는 발단은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 채 교회에 드나듭니다. 참다운 신앙이 생길 리 없습니다. 깊은 믿음이 없으니 행실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물론 보이는 행동이 바르다고 하여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도덕과 준법정신을 따라 얼마든지 올곧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고도의 절제일 뿐 사람의 영혼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응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알 리 없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간구로 시시각각 돕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스스로 추구하는 의로움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상누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신의식이 없는 한 세상의 가치 체계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영적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신행일치의 앞뒤는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행위는 자연스레 따라간다는 원리입니다. 언행일치 뒤에 신행일치를 이루는 게 보통이지만 믿음이 생긴 후 행함에 커다란 변화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줄기차게 교회는 다니는데 행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실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일입니다. 이른바 믿는 척하며 교회당의 마당만 밟고 다닐 확률이 높기에 그렇습니다. 이 경우 본인이 잘 알겠으나 착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지 들여다보면 됩니다. 양심을 속이는 자는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사리사욕에 얽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생적으로 원죄를 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이중적 행태를 포장하며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불행한 일이로되 세상이 어지러운 건 그래서입니다. 이런 지적을 두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왜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분별의 영역입니다. 잘못된 사안을 바로잡기 위해 갖가지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이라는 잣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십계명이라는 율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알려주신 말씀을 무시하는 자를 보고 어떻게 성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모르면 분별력이 흐릿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만드신 분이 삼위의 하나님이니까요. 단순히 오욕칠정의 속성이 아니라 그걸 마음속에 품고 죄악을 키우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바로잡겠다는 자유의지의 발로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분은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나설 때 주저앉는 태도야말로 악의 편을 드는 행위에 속하지요. 늘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리 혼탁합니까?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내로남불’ 때문이지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 관용을 베푼다면 사회는 한결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서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은 겁니다. 내가 좋은 걸 남에게 양보하는 게 실천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최대한 그 방향으로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삶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성도의 필수 요소입니다. 가정에서 실천하고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면 복음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교인들에 의해 교회로 향하는 뭇 발걸음이 가로막혀 있거든요. 뼈아프게 회개할 대목입니다. 그 사역에 결단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2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여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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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6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하나의 본보기’ (하)
    필자가 선보이는 성경에 관한 서평은 지면 관계상 신약의 일부를 소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성경은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w Testament)이라는 2개의 언약, 즉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합 66권)의 책 가운데 총 1,189개의 장에 도합 31,173개의 절과 773,692개의 낱말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책들은 약 1500년간에 걸쳐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각각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약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따르면 모든 성경의 내용은 일개인이 구상한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표적인 저자로는 구약에서는 모세가 있고, 신약에서는 바울을 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역사서(사도행전), 바울 서신서(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일반 서신서(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예언서(요한계시록)가 그것이다. 신약 성경은 대략 서기 45년경부터 서기 95년경까지 코이네 헬라어(공통 헬라어, AD 1세기 그리스의 일상어의 형태)로 표기되었다. 4권의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출생과 33년간의 삶에 이은 사역 및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크게 충돌하지 않는 네 가지의 기사를 알려줌으로써 예수가 어떻게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인지를 드러내면서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 마가복음은 종이 된 예수,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강림한 예수를 공관복음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고, 요한복음은 창조주로서의 예수를 조명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가르친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세상에 파견한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는 특정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그에 따른 실천 항목을 알려준다. 일반 서신서는 추가적인 가르침과 그 적용으로써 바울 서신서를 보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남긴 계시록은 종말 시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고도의 상징과 비유적 언어로 예언한 기록이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개관하는 목적은 서양사의 중요한 대목일뿐더러 인문학을 이루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실체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유의점은 성경 번역이 애초에 문어체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는 개역개정(개역한글 교정본)보다 쉬운 새번역이나 현대인의성경을 권한다. 성경의 창세기를 읽고 적은 독후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성경책을 처음 접한 때는 취학 전이었다. 엄마를 따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레 자그마한 신약 성경을 손에 쥐었고, 한글을 배워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때부터 조금씩 읽어나갔다. 다소 어려운 창세기의 설교를 듣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두 해가 지난 뒤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문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쫓겨났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로 인해 원죄가 생겨났다는 뜻을 알 리 없었다. 창세기 50장이 모세 오경에 속한다는 설명이나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인명과 지명에 질려 노아 홍수에 얽힌 바벨탑의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의 일생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뒤돌아보니 성경의 맥을 제대로 짚어준 주일학교 교사는 아예 없었다. 인간은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원래 영생하도록 만든 존재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참이다. 첫 남자인 아담은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로웠다. 그를 돕는 배필로 지어진 여자가 이브였다. 최초의 부부는 완벽한 조건에서 스스로 창조주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하시며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내리신 터였다. 그러나 뒤늦게 깨닫고 보니 이는 축복이었다. 동산 중앙의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어야 했다. 뱀으로 둔갑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다. 죄로 물든 부모가 낳은 아이는 유전 법칙에 의해 대대로 죄인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원죄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1호)에는 ‘사마리안에게 전한 사계 - 선한 마음의 봄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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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28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서평의 작성법’ (중)
    그렇다면 책을 평가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왜 중요할까? 그것은 독자들에게 쓸만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그 책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다. 서평자에게 해당 책의 가치를 발굴할 책무가 일정 부분 주어진 참이다. 즉 독자에게 책의 조망권을 보장하는 차원이다. 먼저 갈래(장르)와 더불어 제목의 의미를 소개하면 된다. 소재부터 제재를 거쳐 주제로 모아진 제목을 역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책의 표제로 내세운 뜻을 추상화의 과정으로 축약한 것이 제목이기에 그렇다. 목차라는 설계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차례는 책 전체의 조감도인 셈이다. 그다음에는 책의 내용을 쉽게 요약해주되 머리말, 본문, 마무리를 통해 대주제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대개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공헌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은이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 자연스럽다. 저자의 이력을 통해 전문성을 확인하는 절차 또한 독자들에게는 중요한 지침이니까.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이어 읽기를 권장하는 연령대별 명시 또한 챙겨야 한다. 간단히 출판 사항, 즉 출판사명, 출판 연도, 분량(쪽수), 책의 질적 형태(양장본 여부)를 곁들임으로써 소장을 원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일도 자상한 서평의 요건이다. 서평에서 착안할 지점을 꼽으라면 책을 향해 따스한 눈길을 주되 매서운 설득력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데 주안점을 두라고 주문하고 싶다. 첫째는 가독성(可讀性)이다. 글이 쉽게 읽힐뿐더러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때 가독성은 높아진다. 시조시인인 필자의 경우 3·4조의 운율미를 충분히 활용하는 편이다. 첨가어인 우리말의 특성상 명사와 조사의 조합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어절이 서너 글자이기에 그렇다. 그만한 길이에서 읽는 이의 호흡은 차분해진다. 그 대목을 가리켜 시가의 운율을 이루는 기본 단위, 즉 음보(音步, 소리 걸음)라고 이른다. 홑문장과 겹문장의 조화 역시 중요하다. 문체의 적합성에 따라 이해도가 달라진다. 간결체나 만연체, 강건체나 우유체, 건조체나 화려체를 선택하는 건 글의 갈래와 내용에 따라 구분할 문제다. 가능한 한 수동태(피동태)는 지양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둘째는 객관성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책임이 평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과장이나 비약을 포함한 왜곡이나 폄훼는 절대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는 논리성이다. 호소력 있는 전개라야 독자를 설득해낼 수 있다. 논리를 풀이하자면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합리적 과정을 말한다. 논지를 풀어가는 앞뒤에 모순이 없을 때 독자를 끌어들일 힘을 갖게 된다. 넷째는 명확성이다. 특히 어휘의 이중성에 유의해야 한다. 모호한 말은 시적 자유를 제외하고는 허용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누구든지 남달리 획기적인 비책을 바란다면 필자는 대뜸 ‘동어반복 회피의 원리’에 유념하라고 이르집고 싶다. 늘 지시어와 유의어 사용에 인색하지 말고, 자칫 남발하기 쉬운 접속어를 최소화하라는 요구다. 필요할 때 과감히 성분을 생략하는 버릇도 유용하다. 소주제를 중심으로 뭉치는 단락(문단) 구분의 원칙은 같은 생각의 덩어리에 기초해야 한다. 다섯째는 유효성이다. 시종일관 일관성 있는 관점과 해석(비평)의 기준은 일정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전체 주제를 향한 단원별 통일성을 견지하는 게 관건이다. 여섯째는 책무성이다. 근거 있는 비판과 퇴고를 통해 사후의 이의제기에 대비해야 한다. 글을 고칠 때 추가, 삭제, 재구성의 3요소를 익힌다면 완성도는 그만치 올라가기 마련이다. 서평의 서술 방식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호응 관계를 바로잡고, 표현과 구성의 적합도를 높이는 작업은 맹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가령, ‘책은~읽힌다, 저자는~하고 있다, 주인공은~보인다, 작품은~평가할 수 있다’는 정도면 적절하고, 강(장)점은 ‘~돋보인다, 뛰어나다’, 약(단)점은 ‘~낯설다, 한계로 보인다’는 기술(記述)이면 절제감을 더한다. 구성비율은 저자 10~15%, 조망 20%, 내용 30% + 해석 30%, 추천대상 등 5~10%이면 균형감을 준다. 끝으로 필자에게 효율적인 글쓰기 대책에 관해 조언하라면 매일 아침 가정 예배를 통해 성경을 묵상하고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쓰기를 습관처럼 몸에 배게 하려면 매사 기록하며 주제 일기부터 시작하는 게 관건이다. 관심 있는 분야의 꾸준한 독서와 아울러 봉사·견학·여행 등을 통해 글감을 쌓아나가야 한다. 사물을 보는 날카로운 시각과 애정 어린 시선이 글을 잘 쓰는 요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30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하나의 본보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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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22
  • [세상사는 이야기]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독서의 중요성’ (상)
    정보화 사회에서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영역이다. 독서는 어떤 일을 하거나 연구할 때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거나 기본적으로 필요한 배경 지식(schema)은 물론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 즉 지혜를 얻는 데 필수적이다. 오늘날과 같은 격동하는 시대 상황일수록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자료를 섭렵함으로써 간접 경험의 장(場)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시행착오를 예방하기 어렵다. 번득이는 문제의식을 갖고 순발력 있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통해 분석력과 종합력을 향상시켜야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효능감 있는 독서는 사안을 푸는 해결력, 사람을 보는 안목,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독서를 권장할 때마다 시공을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고전(古典)을 추천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높이 평가되는 고전은 best seller, million seller, steady seller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멀리 내다보면 일시적으로 잘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보통 10만 권 이상)나 꿈의 숫자인 백만 권을 넘겨 팔린 밀리언셀러보다는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가 훨씬 나은 경우다. 그만큼 오랫동안 철저히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잘 아시다시피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무려 4억 권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고,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중국의 <마오쩌둥 선집>은 그 두 배인 8억 2천만 권이 팔렸단다. 그러나 놀랍게도 출판업계에 숨겨진 실적은 따로 있다. 지구촌에서 해마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책은 바로 성경이다. 작년 11월 6일 현재 39억 권을 넘어섰다는 나무위키의 통계를 보니 올해 40억 권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다. 왜 그럴까? 성경은 감히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 영혼 구원에 관한 정답을 죄인들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것을 복음(福音, Good News)이라고 부른다. 그 연장 선상에서 독서 전문가들이 신중하게 선정한 필독도서목록에 적힌 책들을 단계별로 완독해내는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다. 모든 일에 깔끔한 뒤처리가 따라야 하듯이 책을 읽은 뒤에는 독후감을 쓰는 과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있다. 그런데 이번 특강의 주제는 한 걸음 더 나간 서평 작성법이다. 서평과 독후감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전자와 후자를 대비해보면 보다 선명해진다. 서평은 객관적인 성향을 띠는 데 비해 독후감은 주관적인 경향을 띤다. 전자가 논리적이라면 후자는 정서적이다. 서평은 이성적이고 독후감은 감성적이다. 앞엣것은 관계적인 데 비해 뒤엣것은 일방적이다. 서평은 외향적이고 독후감은 내향적이다. 전자는 설명적인 데 비해 후자는 감동적인 서술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서평(書評, a book review)은 책의 내용과 가치를 평가한 글, 즉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고, 독후감(讀後感, impressions of a book)은 책을 읽고 난 뒤 느낌, 즉 주관적인 감상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의 사이를 멀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굳이 의인법으로 비유하자면 성격이 다른 형제자매간이나 사이가 좋은 이웃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좋은 서평을 쓰는 데 필요충분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줄거리를 파악할 때 밑줄을 그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군데군데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면 여러모로 유리하다. 응당 책을 너무 아끼면 곤란하다. 장별, 단원별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기록장은 필수다. 인간의 망각곡선은 생각보다 금세 바닥을 치는 법이니까. 따라서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아이디어를 저장하지 않은 채 훌륭한 글을 남기기는 매우 어렵다. 흔히들 던지는 질문 가운데 독서법에 관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정독이 힘드니 속독을 어떻게 하냐고 캐물어 봐야 그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내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곳을 골라 읽는 발췌독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느냐부터 소리 없이 묵독할 때가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낭독할 때가 있다. 그중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으나 이 또한 이해력, 즉 글을 행간까지 읽어내고 쓸 줄 아는 문해력(文解力)에 달려있다고 본다. 공들여 정성껏 쓴 서평을 호평이나 혹평이냐에 관계없이 공론화할 것이냐의 여부는 최종적으로 본인이 결정할 문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9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서평의 작성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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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14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성경은 구원의 약속’ (6회)
    우리네 인생은 저마다 주어진 달란트를 노자 삼아 떠나는 자유여행이다. 그 가운데 지혜문학이야말로 생의 지축이 흔들릴 때마다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다. 상처 많은 일생을 통해 곁에 두고 읽을 지혜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축복이다. 당신이 주님의 자녀라면 영혼의 잘됨을 인도하는 탁월한 길잡이를 최대한 활용할 일이다. 특히 양날의 칼 같은 언어를 조심하라는 것이 잠언의 숱한 타이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훈계를 싫어한다. 지혜를 버리고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고귀한 삶을 영위해야 마땅하건만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나 점점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가는 연유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러기에 잠언은 누차에 걸쳐 가르치며 경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련한 계집의 초청에 응하면 망하는 길로 접어든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거부하는 자의 종말은 빤하다,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살아날 자는 하나도 없다는 데도 굳이 이를 거부하는 선택이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참이다. 악인이 되지 않는 길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다. 단순히 지혜로운 권면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돌아서면 된다.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악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선하게 살려면 언제나 지혜자의 명철을 사모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중에 으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주옥같은 말씀을 부지런히 섭렵해야 한다. 더불어 후대에 가르쳐 함께 지켜내야만 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분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기에 그렇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창조주 앞에서 무언가를 숨겨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매한 일이다. 전도서 7장 29절의 말씀 그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 없이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행위다. 그것을 깨닫는 일이 최고가는 이성이다. 훈계가 되는 잠언을 지킨다면 우리의 삶은 빛나는 지혜로 넘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변화할 수 있다. 지혜문학 열차에서 내리며 깨달은 지혜는 명백하다. 잠언에서 추구하는 지혜의 세계는 인간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사람을 천시하고서는 슬기를 터득할 수 없다는 법칙이다. 지혜문학의 어휘 속에 담긴 내용의 핵심이 심판의 필연을 강조하는 연유다. 창조주가 주신 권능을 극대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시기가 목하 오늘이라는 외침이다. 하나님께서는 공평무사를 주문하시는 이유다.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지혜문학 전반에 흐르는 지혜의 총합이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쏟아부으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공명정대한 규칙 속에서 심령의 내면을 일일이 감찰하신다. 맡은 바 책무를 겸허히 감당하라는 것이 주님의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지혜로운 말씀을 경청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고이래 창조주께서 주시는 교훈을 멀리하는 자에게는 그 해악이 삼사대까지 미쳤거니와 오직 말씀에 근거해 살아갈 때는 대대로 천대까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지복(至福)의 비밀을 값없이 알려주신 참이다. 하지만 즐거움에는 반드시 절제가 따라야 한다. 주신 능력의 남용은 필연적으로 판단력의 마비를 가져온다. 유혹의 올무에 걸려들지 않는 지혜는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섭렵할 수 있다. 여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마음의 제어는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참된 지혜요 공적 정의이기에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신중한 말이 긴요한 바는 그래서다. 조리 없는 불필요한 논쟁은 십중팔구 다툼을 유발하므로 경계하라는 경고다. 책망은 그 유익을 심사숙고하여 우회적으로 시도할 일이다. 그러니 충고는 먹히는 곳에 시와 때를 따라 권고함이 슬기다. 인간인지라 근묵자흑(近墨者黑)하다 보면 멸망의 길로 함께 휩쓸려 가기 십상이다. 범죄하는 자와 어울리면 같이 죄를 짓게 마련인 것이 인간사회의 한계적 상황이다.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나의 알량한 선행을 운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을 것이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전도서 17:27)”라는 말씀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 가감 없이 자복했다. 인생의 허약함을 고백하기 시작한 터였다. 회복에 대한 확신의 섬광이 잠자던 욥을 일깨운 참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의롭다고 하셨기에 드디어 의인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바였다. 살아온 세월에 대한 탄식과 절규는 비단 욥이나 솔로몬의 몫만은 아니었다. 천상에 먼저 간 다윗이 그랬고, 바울도 그러했다. 뒤늦게나마 지혜의 가치를 알아가는 사람들의 행보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성도는 깊고 높은 회개의 사다리를 통해 절대 순종을 배워야 한다. 순수한 복종 뒤에 주신 것은 아낌없는 축복이었다. 그 끝점에 영혼 구원이 있다. 그분의 주권적 통치에 동참하는 것만이 인간들이 애써 실천할 덕목이다. 젊디젊은 날에 위로부터의 슬기를 터득하여 주어진 달란트만큼 열심히 살다가 말년에 자손들에게 은혜를 전수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이슬처럼 사라져갈 인생의 도정에서 감지하는 창조주의 사랑만이 지상최대의 행복을 담보하는 첩경인 것이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나의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8호)에는 ‘독서와 서평의 관계성 - 독서의 중요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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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4-07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은혜로 얻은 지향점’ (5회)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잠언, 욥기, 전도서를 통한 지향점은 인간의 영적 지혜에 있다. 세 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쓰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생을 어떻게 잘 경영할 수 있는가? 인생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닥치는 재난은 어찌 대처할 참인가? 그 상호작용의 관계를 힘써 정리하고자 한다. 지혜문학에서 다룬 주제는 모든 인간에게 절실한 자양분이다. 응당 솔로몬(아굴과 르무엘 포함)과 욥에게 영감을 주신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그 말씀에서 위로와 평강을 얻지 못한 이는 없다고 본다.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간은 언제나 삶의 등불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에서 추구하는 바를 일견 비관주의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필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기에서 읽히는 축복을 극구 설명해보라고 요청한다. 더구나 잠언 기자가 기술한 악의 창궐을 저주의 길로만 해석하는 관점에도 반대한다. 의로운 길에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든지 사후보장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막장이다. 잠언과 전도서의 관계를 두고 창조적 긴장이라고 주석을 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참다운 지혜는 창조주의 은혜를 깨닫는 데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다. 현재의 고통에 어떤 반박을 가하든지 성도의 태도는 결연해야 한다. 외식을 유난히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위 이전의 동기를 중시하시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문체는 언뜻 잠언서에 나오는 격언체의 그것과 구별이 안 가는 이유다. 무상감을 극복하는 길이 이생에 있지 않고 내생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부 현상에 대해 회의하는 사색까지 색안경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어두운 면은 보상적인 지혜와 결코 상극에 있지 않다. 이 또한 전도자의 눈높이와 불일치하는 측면이기는 하되 인간사를 관조하는 면에서는 참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늘 우주적 질서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었고,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의 과학마저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현인일수록 자신들이 추구하는 실존적 안정에 대한 신의 최종적 거부권을 존중했다. 삶의 현안에 대한 주요 수단으로써 기능한 것이 이른바 유비(analogy)였다. 유비(類比)는 유비추리의 준말로써 서로 다른 사물 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유사성 내지는 공동성을 뜻한다. 그들은 적절한 유사를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일지언정 목표 자체는 아니라는 맥락에서 잠언을 검토해야 한다. 그 주제 분석을 통한 필자의 의사는 간단명료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분이시라는 대전제다. 명제는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있었다. 따라서 고난사는 어제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내일도 계속될 일들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에서 연유한 의심과 욕심에 기인한다. 바로 이 양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누릴 복락을 차버리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둬가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의심 없이 욕심을 버리고 감사로 받아쓰면 족하다. 누리면 고마운 이치를 끊임없이 싸우고 다툼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영육 간의 빈곤을 자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기획하는 진보와 퇴행마저 여호와의 최종적인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우리가 절대자를 시험할 권리는 전연 없다. 우리의 한계는 늘 하나님께 두는 소망이어야 한다. 그분은 끝까지 우리가 가지는 일편단심을 보신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전개 방식이다. 토기장이를 향하여 나의 존재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그러한 결단과 현명함을 그분께서는 언제나 기뻐하신다. 신앙이란 차갑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완충지대는 없다. 그 사잇길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비단 잠언, 욥기, 전도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에서 일관성 있게 제시하시는 길이다. 불협화음의 원인은 늘 인간에게 있었다. 정답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예고편이자 경고등이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기에 그렇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를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의 복된 위상을 누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매번 언급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이 창조 신앙이 흐려질 때 신을 향한 경외심이 풀어진 모양새로 나타난다. 차마 불경스럽게도 여호와의 주권이 낡았다는 식의 위험천만한 발상이 불거지는 참이다. 지혜는 창조주만이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의 깊이를 가졌는데 말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자에 대한 찬양은 세세토록 있어야 하고, 생명의 선물로서 영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세세토록 감격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욥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답변은 축복을 배나 더한 완전한 회복이었다. 통상적으로 평온한 국면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짙다. 이때 주의할 점은 욥이 당한 고통은 누구라도 당하면 주신만큼 이겨낼 수 있는 증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마치 자신의 시험처럼 생각한다면 분명 교만이다. 복권되기 전까지의 태도까지를 보신 하나님은 복의 복을 예비하셨다. 육적 소유를 갑절이나 더해 받은 것의 영적 의미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하늘나라의 수단과 도구일 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성경은 구원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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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3-31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솔로몬이 깨달은 것’ (4회)
    솔로몬의 회고담을 두고 일견 가소롭다고 느낀다면 심오한 인생의 이치를 전혀 깨닫지 못한 소이(所以)다. 전도자가 허무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주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근인(近因)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의 사치가 덧없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을 부르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매사에는 때가 있다고 일갈한다. 그때를 어김없이 지키는 일이 창조주에 대한 순종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만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인정할 때라야 영리한 사람이 된다는 경종이다. 창조자 앞에서 겸허하게 수긍하는 젊은이의 지혜가 시급하다고 목청껏 외치는 이유다. 전도자는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처절하게 후회한다. 잘못된 사연들을 보고도 왕으로서 바로잡지 않은 일을 두고두고 한탄한다. 뒤늦게나마 소외된 계층을 외면한 죄가 큼지막함을 깨닫는다. 두루 만연한 악의 요소를 왕이었던 자신이 부추겼음도 상기한다. 재삼 범사에는 때가 있음을 알아야 했다고 땅을 친다. 막강한 힘을 가졌던 자신이 주어진 사명에 극히 불충실했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도자는 무엇이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나서야 크게 뉘우친다. 자신의 젊은 날에 영적 지혜가 없었음을 개탄한다.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쇠하는 원리를 망각한 처사였다. 하나님의 주권을 송두리째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인한다. 초기에 받았던 슬기로움을 여태껏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죄악사의 종점은 파멸이라는 철칙을 몰랐을 리 없었다. 평범한 진리가 비범한 지혜임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세계를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미처 알 수 없었기에 부단한 기도가 필요한 참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속히 깨닫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 과다한 번뇌야말로 마귀가 주는 간계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근심이 죄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깨달음이다.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가라는 가르침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는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명령이다. 전도서는 가치 있는 인생에 관한 탐구서다. 우리에게 태생적 원죄로부터 겸허함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잠언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이 원초적 순종이라고 이르집는 사유다. 창조주의 경영에는 시종일관 통일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비물질을 아울러 전 통치영역을 섭리하신다. 이를 두고도 인간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그 하나는 배타적 경건주의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자율주의다. 솔로몬의 음란한 행각을 보면 얼마큼 의문이 풀린다. 처첩을 무려 천 명이나 둔 그였다. 당대의 문호 개방은 괄목할 만했다는 평가는 더욱 세속적이다. 무역업은 성황을 이뤘고 나라는 풍요를 구가했다. 세간의 관심사는 온통 타락한 지식이었다. 날로 수수께끼 형식의 풍자에 익숙해지면서 낯선 비유들이 한껏 기승을 부렸다. 사람마다 상투적 우화를 즐기는 통에 저마다 식상한 격언을 들먹였다. 특정계층의 지적 독점으로 인해 진리가 왜곡될 만치 불합리한 상대성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들이 간직한 신앙적 유산의 순수성은 급기야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방 문화에 오염되고 만다. 비진리가 진리에 승하는 순간 멸망하는 지름길로 치닫는다는 인류사를 보여준 실례였다. 전도서는 인간의 말초적 사안들을 치밀하게 추궁한다. 살아온 인생을 향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는 되뇜은 인간이 무얼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적실히 보여주는 일갈이다. 자칫 인생무상으로 비추어지기 쉬운 질문은 자신을 향한 통회 어린 자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선행을 실행한다고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서는 허무를 체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정직한 관점을 주문하시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삶을 경영하는 도정에는 절망의 표지들이 끊임없이 순환할뿐더러 결실 없는 탐구에 휘둘려 인생의 궤도를 제어 불능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고 일러준다. 그 지점을 파고드는 말씀이 전도서 1장 8절이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내세워 인간존재의 유의미한 섭리를 확언하셨다. 전도서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을 듣노라면 부질없는 논란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초점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곧 영접을 촉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헛됨의 반대개념으로 영원한 가치를 선물하셨다. 새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삶의 종국을 허무로 규정하신 참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도서 11:9) 더 나아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 12:13~14) 이보다 더 경종을 울리는 말씀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불신한 상태에서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라고 타이르신 연유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은혜로 얻은 지향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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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3-24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욥이 뛰어넘은 시험’ (3회)
    욥기는 창조주의 절대 주권에 관한 일대 천명(闡明)이자 길흉화복에 대한 근원적 응답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선언적 지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당대 의인을 자처하던 욥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그만치 가공할 충격이었다. 그에게 덧씌운 고난은 원초적 신앙을 검증하는 각본이다. 가정의 행복이든 물질의 부요(富饒)든 간에 그것은 절대자의 권역일 뿐, 일개인의 의지적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확증이다. 응당 의인은 단 하나도 없기에 우리는 욥을 만드신 분께 항의할 근거는 아예 없다. 정금처럼 나올 것을 예비하심으로 인해 현재의 극심한 고통을 변론하거나 상쇄할 근거조차 없다. 그저 죽음을 구걸하는 자 앞에서는 천국마저 보이지 않는 언약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대적 의인에 속했던 욥에게 불어닥친 고난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 배우자마저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가 소생하여 재기할 소망은 거지반 없어 보이는 국면이다. 욥을 울린 세 친구를 통해서는 온갖 요설(饒舌)의 위험성을 연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욥의 순전하지 못한 믿음을 추정한다. 남이 미처 모르는 욥의 불의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해댄다. 욥도 사람이기에 자조적 한탄을 시작한다. 기세가 오른 친구들은 무서운 죄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런 사태가 올 수 없음을 들어 마구 을러댄다. 그러나 욥은 쉽사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예상이 빗나가자 친구들은 욥을 에워싸고 약을 올린다. 그들이 토설하는 현장에는 온갖 궤변만이 난무한다.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이다. 겉으로 내보이는 동정은 우월한 감정에서 나오는 한낱 위장일 따름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돌아가신 십자가 형틀이 적나라한 현장이었다. 친구의 파멸을 재촉하려는 가면들 속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두고두고 풀어가야 할 숙제인 셈이다. 범상치 않은 욥의 위대성이 그 순간 번득인다. 의로운 욥이 회개를 떠올린 터였다. 욥은 곧바로 세 친구를 위해 간구한다. 우리가 호소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다. 타락한 천사의 궤계마저 창조주의 의도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씀은 퍽 흥미롭다. 땅을 두루 살피다가 돌아온 사탄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피조물처럼 장담하신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마귀의 대처는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기 1:9~11) 하나님의 대답은 다소 의외이셨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기 1:12) 사탄은 잔혹할 만큼 욥의 일가를 난도질했다. 욥기를 묵상하며 그때마다 간구하는 제목은, “오 주님, 이와 같은 일은 욥 하나로 족하나이다!”이다. 필자가 주목한 바는 창조의 비사(祕史)이다.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욥기 26:7~12)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욥기 28:25~26)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욥기 37:10~11) 창조주께서는 끝으로 욥에게 물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 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욥기 38:4, 38:18, 38:36~38) 글자 그대로 창조 사역의 비경(祕境)을 보았다. 고난과 죄의 문제는 꽤나 난삽(難澁)한 데가 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실험 삼아 시험하셨다고 단정한다면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만다. 적실한 것은 욥 또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 역시 원죄의 사슬에 묶여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였다. 욥의 위로자를 자처한 세 친구는 저마다 자신들의 자랑을 드러내는 데 바빴다.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신랄한 논쟁은 그들을 자칫 그릇된 곳으로 빗나갈 수 있었다. 벗이라는 알량한 명분에 갇혀 하나님의 의를 재단하는 죄악을 저지를 뻔했다. 영적인 깨달음 없이 행하는 욥의 의로움 정도로는 한 줄기 빛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이윽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답변은 축복을 더한 회복이었다. 따라서 욥의 단말마적 고통을 일회성 시험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교만이다. 소유를 갑절이나 받은 욥의 선물은 천성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이미 구원받은 영혼을 더하면 자녀의 숫자는 아들 열넷과 딸 여섯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5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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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7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잠언은 일용할 양식’ (2회)
    잠언은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딱 한 달이 걸린다. 해마다 12번씩을 반복하다 보면 말씀에 인(印)이 박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말씀을 묵상하는 일 못지않게 체화(體化)하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필자의 경우 잠언 말씀을 읽고 출근하는 날이면 까다로운 일을 제법 슬기롭게 처리하여 스스로 놀랄 때가 있었다. 잠언의 영적 가치를 품고 부지불식간에 지혜로운 사람을 닮아간 터였다. 이는 나의 생생한 체험담이다. 지혜란 관념 속에 머무는 공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어느 구절인들 허투루 지나칠 리 없겠으나 잠언이 주는 지혜가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감싸고 돈다는 증거다. 오래전 글을 풀어가는 작법(作法)을 가르치며 대뜸 잠언 읽기를 추천한 제자가 떠오른다.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으니 깊이 깨달으리라고 확신했다. 들리는 만큼 말문이 터지는 어법처럼 읽히는 만큼 필력이 샘솟는 바는 순적하다. 유태인들의 지혜문학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지적 자산인 셈이다.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속담과 금기담(禁忌談) 같은 비유를 통해 격조 높은 격언이나 금언을 적잖이 갖게 되었다. 간결한 관용구를 구사해 다양한 사실관계를 풍자나 교훈으로 넌지시 이르집는 지혜를 일상에서 배우는 기회다. 나아가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연상할 만치 사물의 요긴한 데를 겨누어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구실까지 엿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우리 속담에서 조물주의 존재가 흐릿하다는 점은 심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애초에 신인식(神認識)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니고 원래는 있었는데 유사 이래 수많은 자료나 증거들이 거의 전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놀랄 만한 지점도 있다. 기독교 재단의 각급 학교에서 사용하는 종교 교과서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었다. 이미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 중에 불국사 근처에서 십자가상이 출토되었다는 전언이다. 그것이 왜 국사편찬위원회의 소수 의견에 그쳐 한국사의 중대사로 인정받지 못했는지 의아스럽고 아쉽다. 앞으로 더욱 철저한 검증을 거쳐 종교 전래사의 하나로 자리를 잡기를 열망한다. 잠언의 내용은 히브리 청소년들을 훈계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근면과 정직을 필두로 효도와 신의를 비롯해 경건, 소망, 사랑, 그리고 믿음 등을 가르친다. 그 정점은 슬기롭게 삶을 경영하는 데 있다. 그 구절들을 일일이 들출 수는 없더라도 곳곳에서 인간 본연의 미덕이 묻어나는 건 동서고금의 공통점이다. 이는 부모로서 자식을 훈계하는 일침들이 추상같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통상적인 철학서와는 접근법부터 다르다. 단순한 예절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근본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언 1:2~5)라고 규정하고 있다. 잠언 1장 7절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단정한 것은 전체 말씀에 대한 대전제에 해당한다. 잠언을 관통하는 수사법은 시종일관 대조법이다. 훈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의인이요, 계명에 거역하는 자는 악인이라는 프레임(frame)을 주저 없이 선포하고 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라는 말씀(잠언 2:10)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네 길을 지도하신다는 언약(잠언 3:6)과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언 4:27)는 충고 등이 그것이다. 음란을 경계한 비유는 감탄을 자아낸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잠언 5:15, 5:18) 음녀에 관한 구절은 줄줄이 나온다. 곧바로 6장부터 뒤쪽 여러 장(11, 20, 22, 27장)에서 보증에 대해 훈계한 점은 단연 압권이다. 필자는 특히 8장 36절에 주목한다.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공들여 9장부터 언급하는 화두는 거만한 자를 향한 화살이다. 10장의 주제는 게으름과 부지런이다. 11장에서는 속이는 저울추와 공평한 눈금을 보는 잣대에 과녁을 겨누고 있다. 잠언의 전개는 선행자와 행악자의 궁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5장 1절의 권고는 금과옥조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16장 1~2절은 이를 뒷받침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응당 악인과 선인의 보응은 오롯이 주권자의 영역이다. 18장 22절은 유독 눈길을 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술꾼들을 압도하는 구절은 여럿이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잠언 23:20),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언 23:29~30) 잠언 전체를 요약하면 크게 권선징악, 신상필벌, 사필귀정의 주제 아래 생명에 관한 정답을 실시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4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욥이 뛰어넘은 시험’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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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3
  • [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슬기로운 자의 행보’ (1회)
    창조주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지혜(智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삼위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슬기롭게 지으셨다. 지혜는 지식(知識)과는 다르다. 지식의 범주가 이론에 있다면 지혜는 실천의 영역이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를 말하고,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지식이 다소 현학적(衒學的)이라면 지혜는 다분히 호학적(好學的)이다. 지식이 자신의 박학다식(博學多識)을 늘어놓는 데 비해 지혜는 다방면의 해박한 정보가 없어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지혜가 어떤 처세술 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혜는 실용적 중용(中庸)보다는 철학적 원리원칙을 중시한다. 지혜자의 언행이 일치하는 바는 당위(當爲)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름다운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다.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축복을 시시때때로 누리며 살아간다. 창조주께서 주신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슬기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 그 말씀을 일상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경건한 삶을 살아낸다. 성경 말씀 안에는 온갖 지혜와 보화가 들어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혜 있는 자는 말과 행동을 삼갈 줄 안다. 지혜자는 매사 절제되고 품격있는 언행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의 세계를 알고 즐긴다. 어떤 경우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유한한 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기술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지혜자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그릇된 길을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하신다. 창조주를 사모하는 자들이 받는 지혜를 축복이라고 부르는 근거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생령(生靈)을 지으신 원천이 바로 지혜다. 그 영역을 벗어나 슬기롭게 살아갈 존재는 세상에 없다. 영적 존재인 사탄마저 끝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이다.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길은 결국 축복과 저주로 드러난다. 말씀을 믿고 붙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선을 주시니 감읍한 일이고, 말씀을 거부한 채 곁길로 빠지는 자에게는 기도가 절실한 참이다. 그 종착역에 영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지혜의 목적이 정반대로 나타난 결과는 오롯이 사람들의 몫이다.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주신 결단은 실로 은혜다. 심지어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각자의 자유의지로써 믿도록 설계하셨다. 엄연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자유까지 허락하신 것이다. 다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돌아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까닭이다. 미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영혼들까지 참고 기다려주신다는 결정적 증거다. 하지만 기회는 목숨이 붙어있을 때가 유효기간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기를 애타게 바라시되 그마저 결정권은 각자에게 위임하신 터다. 문제의 근원은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언 1:6)라는 말씀을 수용하지 못한 연고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셨다. 이른바 모세 오경을 통해 친히 모든 지혜를 일러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지혜의 총합이다. 십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힘써 지키지 않는 자는 어리석었다. 요셉과 다니엘이 받은 축복 가운데 으뜸이 바로 지혜였다. 모세와 다윗 또한 지혜로운 자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탐욕으로 빚어진 분쟁을 잠재우고 갈팡질팡하는 무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다만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지혜롭지 않은 행실을 죄다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들마저 자유의지를 선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일수록 자유의지를 선용했다. 자유로이 즐기는 권리는 그에 상응한 의무를 수반한다.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엄청난 권한이기에 책임이 따른다. 기실 그 권세를 엉뚱한 데 쓴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였다. 그 부부가 저지른 우매함으로 인해 죽음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죄의 속성이 자자손손 유전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나님께서 정녕 그와 같이 예고하셨기 때문이다. 지혜롭지 못한 인간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창조주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 그런 뜻에서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 아니라 불신이다. 불신앙이 인간들을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해버렸다. 구세주 예수님께 전심으로 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인 줄 모른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영혼을 지으신 까닭이다. 그러나 세계관을 바꾸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는 자들에게 양문을 여시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 기인한다. 자신 안에 감춰져 있는 지혜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지혜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태부족한 것도 한 원인이다. 우리 안에 지혜가 이미 주어졌음에도 저마다 꺼내서 사용하기를 주저한다. 아예 지혜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슬기를 찾아내라고 주신 성경 말씀이 바로 지혜문학인 것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3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잠언은 일용할 양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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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4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신령한 처소를 찾아’ (5회)
    그로부터 칠 년 후, 드디어 독립된 서재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잘 나가는 가게처럼 신장개업한 서가는 명실공히 나의 지식을 쌓고 다듬는 공간으로 터를 잡았다. 주거환경으로서는 목이 좋다는 곳으로 이주한 뒤 한없는 감사로 젖어 있던 그때 에벤에셀의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도록 인도하셨다. 책장이 두둑해지며 영적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때가 차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셨다. 막상 신학의 문에 들어서니 거대한 학문의 성채였다. 세상의 어떤 학문도 신학 앞에서는 한없이 왜소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드높아 보였다. 학기에 학기를 더하며 위를 올려다보니 바라볼수록 높다란 장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래서 아덴의 고대 철인 중에는 철학을 일컬어 ‘신학의 시녀’라고까지 고백하지 않았던가. 세기의 석학들이 제아무리 인문학을 거론하며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들먹여도 신구약 성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적으로 탁월할수록 감히 범접하지 못할 창조 사역의 비밀이 녹아있기에 그렇다. 유한한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계시(啓示)의 기원을 전지전능한 신께서 몸소 열어주신 참이다. 신학의 길은 멀고 험했다. 아직은 일천한 배경지식 탓에 제대로 된 신학 논문 한 편을 완벽히 소화해내는 데도 남모를 시련이 따랐지만, 바지런히 이 책 저 책을 들추며 기웃거려보는 특유의 버릇만은 여전했다. 춘부장의 서가를 정리하는 동료 교사에게서 관련 서적을 트렁크에 가득 실어온 적도 있었다. 이러구러 첫해와 이듬해 수집한 신학 서적이 기대치를 넘어 칠백여 권에 달했으니, 모두가 예수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랴. 이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책에 대한 과욕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라서 퍽 조심스럽기는 해도 뒤돌아보면 나는 세간에서 평가하는 책 수집상은 될지 몰라도 훌륭한 장서가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게 확실하다. 여하튼 대강 정돈하여 세어본 총 장서 수는 어림잡아도 삼천오백 권을 훌쩍 넘긴 듯했다. 웬만한 동네 서점에 온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을 보낸 뒤 사뭇 흐뭇해하던 연초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하다. 나의 서재에 꽂힌 책들은 그렇게 긁어모은 거였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장서수집의 대원칙도 수립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책들과 신간들이라도 과감히 정리해 나갈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어떻게 모은 책들인데 단 한 권인들 집 밖으로 내치듯 떠나보내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신중히 솎아낸 책들은 그냥 내다 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한 곳을 찾아갈 것이므로 안심해도 된다. 이윽고 눈에 비친 나의 서가는 내심 새로운 모습으로 정화를 바라고 있다는 걸 스스로 눈치챈 소이(所以)였다. 그 원칙에 따라 여태껏 수거한 책들이 줄잡아 오백여 권은 족히 되지 싶다. 그간 서재 한쪽에서 밀려난 책들은 다른 방으로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방바닥까지 잠식해 오는 걸 본 다음에는 결정을 더는 미루기 어려웠다. 향후에는 더 엄선해서 살 책을 고르고 손에 쥔 책은 반드시 읽고 소화하는 데 집중할 요량이다. 두고두고 참고할 게 아니면 곁에 남겨두는 데 치중하지 않고 남들에게 선물하든지 기부하는 일에도 눈을 돌릴 생각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서재에 걸맞은 이름을 짓는 일이다. 길게 고심할 것도 없이 나의 아호처럼 대나무를 닮겠다는 뜻에서 <죽향재>(竹向在)라고 붙였다. 대쪽 같은 성품을 본받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어서다. 내 깜냥은 모자랄지언정 자신을 비운 채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간 자태를 지향할 참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처음 이사 와서 우리 네 식구는 오붓이 서재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어언 아들딸이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고부터는 아내와 단둘이 식탁에서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서재가 다시금 신령한 처소로서 의미를 되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감지해낸 터였다. 총 삼천여 권의 책들 가운데 채 삼 할도 안 되는 구백여 권만을 겨우 읽어낸 참기 어려운 지성적 가벼움을 영적으로 숙성시켜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서재를 번듯하게 겉으로 꾸미고 가꾸는 데서 벗어나 마냥 책을 향한 사모의 정만을 앞세우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허기진 육신을 요기하는 서고가 아니라 영혼 구원에 필수적인 믿음의 양식을 공급하리라. 그렇게 영적 내실을 다질 때 참 신앙의 풍요를 누리며 내게 주어진 지복(至福)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2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슬기로운 자의 행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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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의 이야기
    2022-02-17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지적 탐색기에 들어’ (3회)
    그러나 쌓인 책의 무게로 인생의 부채가 탕감되는 건 아니었다. 연달아 실패한 대학입시를 지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운 시간은 흘러가는데 막상 만회하라는 공부는 등한히 한 채 목표로 잡은 건 교과서가 아니었다. 장르별 문학 서적을 위시해 사회를 심층 분석한 시론(時論)에다 동서양의 철학서까지 알량한 독서목록에 등재해 놓았다. 무슨 대단한 독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지병처럼 앓던 내용 공포증을 얼마큼 떨쳐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중에 이해가 쉽잖은 사상서를 통해 사고의 깊이를 더했다. 그해 일기를 자주 챙겼던 덕분에 공영방송에 보낸 독후감이 채택되어 인기작가였던 최인호로부터 저자 서명이 담긴 두 권의 책을 받아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입시정보를 캔답시고 <진학>이라는 월간지에 나온 대학들의 면면을 훑어보느라 정작 본고사는커녕 예비고사 대비도 게을리했으니 여전히 나의 장래는 안갯속이었다. 대학의 관문 통과에 매진할 시간에 그토록 한눈을 팔다니, 돌이켜보면 창조주를 잊고 나댔던 나의 과거 행적은 한심한 투기적 노름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지방의 한 유서 깊은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영장이 날아들었다. 오백 여권의 책을 뒤로하고 입산한 병영의 시계는 실로 끔찍한 체험의 연속극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한 치 앞을 분간하기조차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멘탈(mental)에 붕괴가 올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길바닥이나 도랑에서 주운 흙 묻은 신문지[舊聞]를 몰래 주머니에 구겨 넣어 재래식 화장실에서 쭈그린 채 읽기를 시도할 만치 엄혹했다. 부당한 구타와 대접 등 말하지 못할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동해안 경비를 맡은 말단 소대(소초)에서 최고 사령부의 본부대까지 치고 올라가며 복무하는 동안 작전참모부에 차려진 군사도서관을 떠맡았으나 그렇다고 차분히 앉아 독서에 임하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급급한 인간 군상의 이기심들로 인해 허덕이듯 절망하며 바싹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제대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병사의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무사히 이뤄지고, 차가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낸 복학생은 베드로 광장이 정갈한 독일식 기독교대학 캠퍼스로 귀환했다. 북적이는 대학 강의를 섭렵하는 데는 전연 무리가 없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아 중앙도서관의 지정석까지 얻어 장학금을 타내던 참에 여기저기 낙후된 공공도서관 시설에 눈길이 갔다. 주로 대도시에 산재한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는 후진국형 열람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서관학(요즘은 문헌정보학으로 개칭)이라는 전공을 택할 때만 해도 남달리 학구열이 불타올랐는데 지금 와서 반추해보니 교정 안에서의 책 모으기는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만만찮은 생활비를 쥐어짠 끝에 150권짜리 문고본을 장만했고, 몇 개 시리즈물과 전공 서적 수십 권 정도만 서가에 꽂을 수 있었다. 역시나 문제는 취업난이었다. 전두환이 발호하던 1980년대 전후 유가 폭등으로 몸살을 앓던 경제가 해마다 곤두박질을 쳤기에 쉬이 따놓은 줄 알았던 남자 사서직마저 기약이 요원했다. 게다가 학점은 좋으나 평소 관계 형성에 소홀한 이력에 점수를 깎아 먹는 바람에 빈자리는 어느새 예뻐 보인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서울의 미션스쿨에 자리가 났다는 통보를 받은 건 춘삼월 막바지였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지식안내자를 자임하려던 나의 포부가 무모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 운영 전반의 체계화를 이루지 못한 곳에서 내가 할 수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일단은 따분한 일상을 타파하기로 계획했다. 서둘러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러도 한편으론 아직 봇짐을 정리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일간신문을 펼치니 한 대학도서관의 사서직 공채 시험 공고가 눈에 띄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연봉 협상에 미심쩍은 데가 있어 허락을 받고 하루 출근해보니 내가 반평생을 걸만한 곳은 아니었다. 타개책은 공부를 계속하는 길이었다. 졸업 후 학교도서관에 심기로 약속한 이름 없는 사서 선생의 소명감은 훨씬 열악한 악조건들 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깊은 고민 없이 거꾸로 주독야경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나는 애당초 구상했던 국어교사의 길을 향해 늦깎이 편입을 결행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0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영적 감지기를 맞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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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영적 감지기를 맞아’ (4회)
    천여 권의 책을 짊어진 채 시동한 국어국문학이란 학문은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오후 네 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끝나는 직장 일을 병행하고서도 나는 높은 학점을 받았다. 적성에 들어맞는 학업의 진전은 괄목할만한 지적 성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턱없이 모자란 수면의 질량으로 급격히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했다. 나는 전공과 관련한 책들을 모으는 재미로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재고 코너와 할인매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줄기차게 발품을 팔다 보니 가뜩이나 비좁은 전세방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제집 장만도 못한 주제에 참으로 유별난 취미를 가졌다며 수군댔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치열한 관문을 뚫고 곧바로 교육대학원생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추동력은 평온한 가정이었다.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졸업논문을 쓰는 일에 집중했다. 세 명의 동기 가운데 홀로 석사학위를 마무리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 어렵사리 시작한 나머지 대학 2년과 야간대학원 2년 반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수학 연한이 남들보다 뒤로 밀리기는 했어도 얻어낸 열매가 결코 작지 않았다. 허송한 세월을 따라잡아 보았고 맞이할 미래를 앞당겨 다져보았다. 그해 겨울 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전세에서 새집으로 옮긴 환희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울을 떠난 책의 숫자만도 이미 나 혼자서는 짊어지기 어려운 천 권을 넘어섰다. 난생처음 마련한 내 집의 구석방에 바라던 서재를 꾸미기로 했다. 농부 겸 목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손을 빌려 칸칸이 번듯한 서가를 세웠다. 누가 봐도 멋들어진 새 책방을 번듯하게 마련한 터였다. 얼마나 고대하던 나만의 서재였던가. 고대 때는 지금이다 싶어 잽싸게 고향 집 구석방에 쟁여놨던 서책들을 공수했다. 한 달에 걸쳐 책 정리를 마치고 나니 남부럽지 않은 서재가 위용을 드러냈다. 제법 주제별 배치까지 고려한 듯 쳐다볼수록 흡족하기만 했다. 책에서 나는 냄새가 옛날 가마솥 누룽지처럼 구수했다. 한 칸 한 칸 서가를 채워가는 재미가 이토록 쏠쏠한지 미처 몰랐다. 내 명의라야 달랑 집 한 채가 다였지만 농부가 땅뙈기를 늘려가는 기분이 흡사 이럴 거 같았다. 솔직히 빈 서가를 메우는 마음만치 책장을 넘기는 보람을 느꼈는지를 되돌아본 계기였다. 그런데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바야흐로 영적 감지기에 접어든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릴 예배당을 찾은 건 그때였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다시피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반경을 한껏 넓혀 오산에서 천안까지 훑고 다녔다.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는 드렸지만 영안이 열리기 전이어서 목회자들이 극구 감추는 데까지 훤히 꿰뚫기는 어려웠다. 쏟아지는 교재 연구에 가르치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서적 읽기를 늦춘 것은 영적 침체를 불렀다. 그중 직장 내 신우회 모임을 통해 어느 정도 도움은 받았으나 그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성경 주석서를 접할 수 있는 호기(好機)였는데 성과 없이 끊겨버린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그나저나 장서 이천 권이 되려면 지혜와 지식을 녹여 만든 세월의 지층이 좀 더 켜켜이 쌓여야 했다. 그 틈에 어렵사리 마친 아내의 방송대 수학 덕분에 가정학에 관련된 책자가 백여 권 늘어난 것은 흐뭇한 지점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은 유의미한 장서 확보에 소강상태를 보였다. 요즘 들어 뼈저리게 느끼는 건 지속 가능한 일이라야 주목할 만한 성취감을 담보한다는 원리다. 그때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이라며 변명 아닌 설명을 애써 해대고는 있지만 실은 뭔가 지적 허기를 느꼈던 건 사실이다. 확실한 주제 없이 살아온 열기로 인해 태부족한 소일(消日)이 그 까닭이었다. 한사코 털어놓기를 주저한 터여서 여태 분출하지 못한 지성적 에너지원이 거르지 않은 잉여물처럼 심연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 산책과 등산의 그윽한 묘미를 알아차린 건 천만다행이다. 물론 방이 하나 더 있는 큰집을 마련하기 위한 초 긴축가계운영도 책꽂이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답적인 취향이 멀리 달아나 버린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고 분별한 책들은 시와 때를 따라 곤궁을 면할 만큼은 사서 읽은 편이어서 굳이 수집 형태만 놓고 본다면 도리어 바람직한 형태로 바뀐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기실 유능한 장서가들을 보노라면 다 읽은 책이나 더는 묵히기 아까운 책들을 흔쾌히 기증하고 있으니 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1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신령한 처소를 찾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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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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