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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구국의 영웅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작성일 : 20-02-18 16:41    
김인국(외교부 평택 SOFA 국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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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2월 말 평택에 부임한 이후 근무지인 평택을 경험하며 배우고자하는 마음으로 여러 문화유적지들을 부지런히 답사하였다. 평택은 문화유적지의 숨은 보고(寶庫)라 할 만큼 문화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하여 있어, 유적지 답사만으로도 인문학의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그야말로 배움의 현장이었다. 그간 답사한 주요 유적으로는 평택호 혜초 기념비, 평택 객사, 평택 향교, 수도사(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 원균 장군 묘 및 기념관(보물 1133호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교서), 삼봉 정도전 기념관(삼봉집 목판), 홍학사(삼학사중 홍익한) 비각, 대동법시행기념비, 심복사(보물 565호 비로자나불좌상), 민세 안재홍 생가, 충의각(정암 조광조 및 추담 오달제 유허비), 신숙주 사당, 팽성 농성, 진위 향교, 만기사(보물 567호 철조여래좌상), 3.1 운동 백주년 기념 조형물, 남아공 6.25 전쟁 참전기념비, 이대원 장군 충절을 기리는 확충사 등이다.
 
 여러 문화유적 중 확충사는 지난 2월초에 답사를 하였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답사한 것은 이대원 장군이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인물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필자의 선입견은 확충사를 답사 후 완전히 바뀌었다. 그간 관심 밖 인물이었던 이대원 장군을 마음속 깊이 흠모하며 열심을 내어 선양코자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임진왜란 발생 5년 전인 1587년 2월 전남 흥양(오늘날 전남 고흥)의 녹도 만호(조선시대 수군의 지역 부대장)였던 이대원 장군은 남해안을 침범해 해적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대상으로 두 번의 해전을 치렀다. 장군은 그해 음력 2월 10일 왜구의 흥양 침입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각 출병하여 왜선 여러 척을 격퇴하고, 적장의 목을 들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직속상관이었던 전라 좌수사 심암은 장군의 전공을 자신이 한 것처럼 해달라는 부당한 요청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강직한 장군에 대하여 성을 내며 앙심을 품게 된다.
 
 음력 2월 17일 왜구는 왜선 18척으로 손죽도 근해를 침범했는데, 다분히 일주일전 패배를 보복하려는 성격이 짙은 공격이었다. 이 때 심암 좌수사는 병력을 더 모아 다음 날 공격하게 해 달라는 장군의 요구를 묵살하며, 지쳐있는 수군 100여명만으로 왜구를 당장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장군은 후발대로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남긴 채 출병하여, 적들과 3일간 혈전을 벌이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사로잡히고 만다. 왜구들은 이 장군을 돛대에 매단 채 사정없이 때리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장군은 오히려 적들을 꾸짖으며 장렬한 최후를 선택했다. 왜구들과의 혈전 중 애타게 기다렸던 지원군이 끝내 오지 않게 됨을 안 후, 자신의 속적삼에 혈서로 썼다는 절명시(絶命詩)는 읽는 사람에게 애절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기대하였던 지원군이 오지 않는 데 따른 절망(絶望)이 흠뻑 배어있고,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정이 깊이 어려 있는 시이다. 
 
해 저무는데 적선 왜구들이 바다를 건너오니 / 日暮敵船渡海來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 내 삶이 서글프다 / 病孤勢乏此生哀
임금님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 君親恩義俱無報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 / 恨入秋雲結不開 (원문 및 번역 / 이충헌)
 
 손죽도 해전에서 이대원 장군과 수군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심암 좌수사는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이대원 장군 사후 44일 째 되던 그해 음력 4월 4일 당고개에서 효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역사적 기록이다. 파직되어 한양에 끌려간 심암은 조사기관인 의금부 관리의 비호를 받은 행위도 적발되어, 해당 관리도 파직 당한다. 부하는 사지에 몰아넣고, 자신은 살아보려고 애쓰는 이중인격의 극치라 할 것이다. 안타까웠던 점은 영흥 해전에서의 공적으로 조정에서는 심암 좌수사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이대원 녹도 만호를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으나, 그 교지를 받기도 전에 손죽도 해상에 쳐들어온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장군이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때 장군 나이는 한참 젊은 22세였으니, 짧지만 선이 굵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세상에 묻힐 수 있었던 이대원 장군의 장렬했지만 억울한 죽음이 당시 민중들의 슬픔과 분노, 장군이 혈서로 남긴 절명시, 송강 정철의 장남 정기명이 남긴 ‘녹도가,’ 한천 정협의 조사(弔辭) 등을 통해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사후에나마 명예를 회복하고 사회정의가 회복되는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군에게는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진다. 평택 확충사, 고흥 쌍충사, 여수 손죽도 충렬사, 여수 영당(影堂) 등 여러 사당에 안치된 영정 앞에서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평택 확충사 앞에는 숙종 25년 1699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우측 산자락에는 장군의 애끓는 절명시가 쓰여 진 속적삼으로 썼다는 장군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충렬공 이대원 장군과 심암 좌수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던 그들의 삶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값진 삶인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시대는 바뀌었더라도 조직 사회에서 이대원 장군 그리고 심암 좌수사 같은 부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본다. 심암 좌수사보다는 이대원 장군 같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사회정의가 확보되며 국가안보가 더욱 더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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