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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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열자마자 백혈병으로 사그라지는 아이의 어른스러운 독백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다. 죽음보다 아픈 병마는 때로 어린애를 나이보다 훨씬 조숙하도록 견인한다. 연이어 꺼져 가는 생명을 자식으로 둔 아비의 슬픔 어린 하소연을 귀담아들어 주었다. 어미된 자로서의 차가운 발걸음도 가당치 않거니와 아비로서의 피맺힌 절규도 필자의 귓전에는 차라리 자백에 가까웠다. 그렇고 그런 진행을 꽤나 지루하게 이끌고 갔다. 작가 조창인이기에 충분히 해내리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해도 어딘가 허구에 쫓기듯 초조해하는 기색은 처연했다. 덩달아 조바심을 내는 건 독자들의 몫이었다. 이야기 내내 평자(評者)를 앞지르려는 강박관념을 노출하고 말았다. 그 지점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유감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필자 역시 자식을 키워본 처지에서 품속은 퍽 넓은 편이다. 핏줄을 향한 본능적 동질감만은 어쩔 수 없는 공감대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느냐는 관용구는 기실 외딴 경우에 속한다. 그만하면 쓸만하다는 사고 영역에 쉬이 끄덕였다. 예외 없이 깐깐한 무게에 짓눌린 데다가 아들딸이 겪었을 고초를 뒤늦게 소환한 셈이다. 

  열 살 ‘다움’이가 콕 박혀 있는 침대의 너비를 시인 아빠 홀로 메우기에는 뒷심이 달렸다. 둥지를 박차고 떠난 아내의 빈자리가 유난히 큰 연유다. 그걸 잊겠다고 덤벼든 한 부모의 몸놀림은 어설픈 돌봄으로 지쳐버린 지 오래다. 달뜬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보상심리는 푹 패인 잔정의 골만큼이나 구불구불 꼬여버렸다. 개구쟁이들이 도랑물에서 멱감는 물장난처럼 호락호락한 놀이터는 아니어서다. 시골 동네를 가로질러 평화로이 흘러든 예로부터 새끼들이란 부모 개인의 소유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핏줄을 매개로 펼치는 흥정을 동원해 마음에 평안을 얻으리라는 일말의 계산은 애당초 빗나간 작심이었다. 모름지기 정해진 수순이라고 보는 쪽이 속 편하다. 나날이 몸무게가 늘어나는 ‘다움’이가 아빠만 올려다보는 밑자리에서 적잖이 안심한 듯 위안의 끄나풀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점점 ‘정호연’의 소망은 점점 요원한 가두리 양식장이 되어 갔다. 쌍끌이 그물망을 두른 채 거두지 못할 만큼의 간극만 갈수록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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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보문고>

  급기야 아비의 어깨는 급속도로 처지기 시작한다. 지극히 식상한 혼인과 지겹게 보아온 파혼이었다. 상투적인 재혼과 진부한 만남은 지루하기 그지없는 스토리에 불과하다. 이름처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빼닮으려 기를 쓰는 ‘호연’은 양심의 문학과 씨름하다 결국은 부조화를 끌어들여 자존심마저 평가절하한다. 남몰래 순수한 장기기증자로 나서면서까지 사리사욕을 고발해버린 터였다, 극한 도움을 대체해 내세운 마무리 협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성스러운 혼인마저 일시적 감성으로 결단했던 ‘하애리’는 기어이 개인전을 열어 직성을 풀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간다. 딱 한 치 앞날의 현실조차 돌아보지 못한 두 남녀의 여과 없는 결별이 누차에 걸쳐 요지경이 되었던 터다. 여기저기 선보였던 어쭙잖은 줄거리에 작가 자신부터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와 그녀를 그대로 붙잡아 가둔 건 어떤 원동력일까? 각자의 뇌리에서 차일피일 머물도록 사주한 작가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혹여 속물적 성공을 탐닉한 나머지 패착으로 각인될 게 뻔한 방만함을 지레 염두에 둔 걸까? 거친 바람처럼 미성숙한 졸속이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이렷다.

  백혈병에다 간암까지 얹어 엮어간 부자(父子)의 언저리에서 그를 억지로 억누른 건 유년의 고통이었다. 방치를 넘어 방기에 가까운 자물쇠에 길고도 여물게 채워진 과거가 있었다. 그 뒤안길에 도사린 족쇄가 발목을 낚아챈 터였다. 자꾸만 회귀하려는 반평생을 바라만 보다가는 나날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는 신드롬에 노출된 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존재는 그렇게 시시각각 시달리도록 만들어놓은 장치였다. 나를 빼닮아버린 단 하나의 혈육을 지키기 위하여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을 찾아 나선 건 그래도 질박했다. 들숨 날숨을 계속하는지 확인하려는 생존의 몸부림을 목도한 시공이었다. 그 녀석이 아빠를 엄마보다 갑절이나 닮았든 아니든 그건 유치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들내미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다. 그 단계까지 자아를 몰아왔다는 심장이 뛰어놀았으므로. 영혼의 교감처럼 다가온 낌새랄까. 창조 사역을 감안하면 일종의 당위적 명제에 속한다. 그 일이야말로 <가시고기>가 내린 합목적적 처방의 일환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05호)에는 길목마다 <가시고기> ‘구성과 사랑의 깊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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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길목마다 ‘자식과 부모의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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