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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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현의 소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하지만 색다르지는 않았다. 또렷이 유달랐을 뿐이다. 종합하면 여전히 미흡했으되 약간은 진전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어쩌면 당연했고 다소 희망적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나를 황당하게 만들던 그가 저만치서 문학적 화해를 시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아버지를 읽자마자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온 나의 독설에 화들짝 놀란 걸까? 아주 멀리 내빼던 김정현이 사뭇 상기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선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그도 공공연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대낮에 공직자의 신분으로 술집과 호텔을 드나들지 않았고, 남몰래 딸 같은 여자를 유혹하거나 흠모하려 들지 않았다. 무속적 사고를 부정(父情)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생색을 내며 낯뜨겁게 자위하던 심란한 수렁에서도 빠져나온 참이다. 몰염치와 무감각에서 벗어난 만큼 눈에 띄게 건전해졌고, 신분 상승을 노리고 부추긴 역할극에서도 얼마큼은 자유로이 운신하는 듯했다. 이제 다행히 상식적인 시민의식으로 돌아온 듯 보인다.

  사회의 그늘을 글로써 그릴 줄 아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그곳에 기생하는 버러지들을 향해 분노하는 법을 배운 터였다. 덫에 치인 사고뭉치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천주님께 비는 모습은 의외였다. 그분 앞에 엎드려 타인의 힘없는 모습을 고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일그러진 시공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청각 또한 걸음마 단계를 지났다. 적잖이 반가웠고 명백한 행진이었다. 퍽 대견스러운 일이다. 고로 그의 괄목할 만한 전진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칭찬할 마음은 아직 생기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무분별한 행각을 통해 하도 심하게 데어서 그랬는지 필자가 먼저 한껏 고무되어 버린 건 사실이다. 비록 짧게나마 김정현의 후속작 <어머니>를 읽는 동안 그의 졸작 <아버지>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음을 나는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숙제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란 억지 작위에 있었다. 지적받아 마땅할 인위적 설정의 무계(無稽)한 버릇만은 그대로다. 이는 누구라도 어느 정도 고치고 다듬어야 할 과업이니만치 이전처럼 꾸짖지는 않겠으나 더는 문제를 키워서는 안 되겠기에 몇 가지 넌지시 짚고 넘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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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박진심의 일상다반사 블로그>

  거슬러 올라가 그의 붓은 글을 마무리할 무렵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렇게 고함치며 발악하고 도망을 가지만 않았어도, 바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술집에만 나가지 않았어도, 굶더라도 죽더라도 단 며칠만 더 엄마를 기다렸어도, 아무리 차가운 눈빛에 실망을 하고 무서웠어도 엄마 아빠의 부모인데 할아버지 외할머니만 찾았어도, 하는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단 한 걸음이 어긋나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리는 바람에,’……. 그는 무려 네 가지의 이성적 현장을 동시에 거품으로 만들어 소설적 근황을 벼랑으로 몰고 갔다.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되풀이한 셈이다. 돌려보면 어차피 독자들이 어색하게 느끼는 구도란 필연적으로 작가가 지레 캥겨하는 부분인 거다. 아프게 꼬집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가려워 못 견디는 정황을 그녀는 홀가분하게 자백해버린 터였다.

  창녀가 될 뻔한 딸 김미애(사실은 윤은수), 고아원에 맡겼던 아들 영웅, 탈진했다 정신 차린 엄마 혜경, 식물인간이었다 깨어난 아빠 윤성태를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어내느라 수고한 흔적은 역력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꽤나 가설을 즐기는가 보다. 그러나 대전제와 개연성을 이토록 혼동하면 곤란하다. 이쯤 되면 어설픈 허구로 인해 혼란상이 빚어진 경우다. 허구일수록 점조직처럼 얽어 독자를 감쪽같이 이끌어야 독자들이 묘미를 느낀다. 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뒷맛은 영 개운치가 않아서다. 제아무리 세상이 뒤엉켜있어도 연이은 불상사들이 봇물 터지듯 겹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전연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피곤한 <어머니>를 통해 제멋대로 그려나가는 그의 속셈을 볼라치면 이건 생뚱맞다 못해 다소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마치 르네 지라르의 비평서 제목처럼 낭만적 거짓이 소설적 진실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로되 모든 욕망은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촉발된다는 서평에 동의하는 이유다. 즉, 위대한 소설은 대체로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욕망의 허위성을 깨닫게 하거나 진정한 욕망의 의미를 일깨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한길그레이트북스의 메시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01호)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뒷맛 ‘아직 잠자는 캐릭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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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의 손맛과 뒷맛 ‘일보 진전한 구성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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