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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 사람 보는 눈
작성일 : 21-02-22 11:29    

카이사르조차 완성하지 못했던 대제국 기초 닦아 평화의 시대 열어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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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정을 열었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는 여러모로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양아버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처럼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숙적인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3~30)를 꺾고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또한 카이사르조차 완성하지 못했던 대제국의 기초를 닦았는데, 로마에 의한 평화의 시대(팍스 로마나, Pax Romana: 기원전 1세기 말에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제정을 수립한 때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를 열었다. 카이사르와 비교하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던 아우구스투스, 그런데 어떻게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결점을 상쇄시키는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 보는 눈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자 군사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바로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BC 62~12)였다. 어떻게 보면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는 단순히 군사적인 부분 이외에 동지이자 사위로서 아우구스투스를 보좌했던 인물이다. 사실상의 2인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위상이 높았다. 또한 내전을 종식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후 충실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던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 BC 68~8) 등 인재를 중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점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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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투스 <출처 = 바티칸박물관 홈페이지>

 또한 아그리파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 리비아와 전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 Germanicu, BC 38~9)와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 BC 42~AD 37)를 중용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가 양아들이기는 했어도, 엄연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 형제를 중용했던 것은 군사적 재능 때문이었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를 보면 설령 어떤 분야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도, 인재의 배치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이를 아우구스투스 형 인물이라고도 하는데, 카이사르처럼 완벽한 영웅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람 보는 눈과 인재를 활용해 팍스 로마나를 구축했던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은 분명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특히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나름 의미심장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사람 보는 눈의 중요성은 다음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가 되는데, 서로마의 경우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384~423), 동로마의 경우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77~408)가 황제가 되어 통치했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선황의 아들이란 것만 빼면 재능이나 황제로서의 자질은 한심하기 이를 때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호노리우스에 비해 아르카디우스는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 나름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아르카디우스는 왕비 에우독시아(Aelia Eudoxia, ?~404)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는데,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1~45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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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출처 = 바티칸박물관 홈페이지>

 그런데 아르카디우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아들의 나이가 어렸고, 왕비인 에우독시아 역시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후견인을 맡아줄 인물이 부재했다. 황위를 이을 아들을 걱정했던 아르카디우스는 놀랍게도 당시 적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 놀라운 발상을 야즈데게르드 1세가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적어도 이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사이는 큰 불화 없이 안정적인 관계로 돌아설 수 있었다. 

 반면 호노리우스의 경우 서로마의 방위를 책임지던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408) 장군을 의심했고, 결국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훗날 서고트족과 반달족에 의한 로마약탈(Sack of Rome)이 있었는데, 쇠퇴해가던 서로마의 몰락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사람 보는 눈과 인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따라 서로마와 동로마의 운명은 서로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유비는 제갈양을 초빙하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았는데, 바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유래다. 인재를 얻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유비의 모습은 사람을 보는 눈의 중요성과 함께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준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다. 영웅을 갈망하기에 신화나 히어로(hero)와 같은 캐릭터들은 지금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잘하는 영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최적화된 시대라면 말이다. 설령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줄 알고, 인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 역시 리더라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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