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터무니없는 옹호론 아닌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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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 82번지에는 평택 원균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57호)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원릉군 기념관을 개관했는데, 당시 원주원씨대종회 측에서는 원균 장군(1540~1597, 이하 원균)에 대한 인식을 바꿀 계기가 되었다며 반색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여론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실제 원균 관련 영상이나 기사 등을 보면 긍정적인 댓글보다는 부정적인 댓글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평택 출신의 여러 인물 가운데 원균처럼 논란이 되는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보인 행적에 그 답이 있는데, 군사적으로 너무 무능했다. 단적인 예로 경상우수사(慶尙右水師)로 있던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함대를 이끌고 나가 왜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원균은 이러한 상식적인 행동과는 정반대로, 군영을 불태우고 함대를 자침(自沈)시켰다.
 
 결과적으로 제 한 몸 건사하겠다고 조선 수군의 전력을 와해시킨 행동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또 있다. 훗날 이순신 장군의 파직과 함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조선 수군의 궤멸을 가져온 칠천량 해전의 패전과 관련한 원흉이었다. 결국 무리한 출병으로 2만에 가까운 조선 수군과 그동안 최강으로 평가받았던 조선 수군의 궤멸은 원균의 책임이었다. 실제 당시 사관은 다음과 같은 논평으로 조금 길기는 하지만, 원균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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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원균 장군 묘, 해당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권99, 1598년(선조 31) 4월 2일 기사 중>”
 
 위의 사관의 평가는 당대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무능했던 원균은 대중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결정적인 악수를 두게 되는데, 바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함과 파직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보인 원균의 행적은 무능한 졸장의 대명사가 되었고, 능력 밖의 인물을 큰 자리에 앉혔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원균에 대한 반성과 교훈의 역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닌 원균에 대한 옹호론을 펼치는 것은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다. 따라서 원균에 대한 무리한 옹호보다는 교훈의 역사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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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 장군 묘의 묘비 
 
■ 통영에 있다고 전해지는 원균 묘를 아시나요?
 
 원균 장군 묘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바로 가묘라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균의 최후를 알아야 한다. 선전관 김식이 올린 장계를 보면 칠천량 해전의 패전 당시 원균이 배를 버린 뒤 육지로 상륙해 도망가던 중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권90, 1597년(선조 30) 7월 22일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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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천량 해전지, 원균의 무능을 보여주는 현장, 조선 수군의 궤멸을 가져온 참담한 패전이었다. ⓒ 이경렬
 
 장계를 보면 원균이 상륙했던 곳은 추원포(秋原浦)로,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이다. 즉 원균은 추원포를 통해 통영에 상륙한 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원균의 최후에 관한 기록이나 시신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평택에 있는 원균 장군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로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원균의 묘로 추정되는 장소가 통영에서 확인이 되어 주목된다. 해당 장소는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 435번지로, 국도(77) 바로 인근에 있다. 외형으로만 보면 무덤인지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데, 지역에서는 엉규이 무덤 혹은 傳(전) 원균 묘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왜 원균의 묘로 전해지게 된 것일까? 통영 지역에서는 해당 무덤이 엉규이 무덤으로 불려왔는데, 여기서 엉규이가 원균의 이름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해당 무덤의 위치를 주목해야 하는데, 앞선 김식의 장계에서 보듯 원균이 상륙했던 지점은 추원포(秋原浦), 즉 지금의 통영이다. 따라서 해당 무덤과의 연관성을 본다면 원균의 묘로 전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해당 무덤은 아직까지 발굴이나 제대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방치되었던 傳 원균의 묘는 한때 국도 77호선의 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있었지만, 가까스로 보존 결정이 내려져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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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傳 원균 묘, 엉규이 무덤으로도 불린다. ⓒ 김상현 
 
 이러한 통영의 傳 원균 묘를 지금처럼 그대로 두어야 할까? 물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선 해당 묘의 발굴과 조사 등을 통해 이곳이 정말 원균의 묘가 맞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후 원균의 묘로 확인된다면 그 자체로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칠천량 해전과 원균을 테마로,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교훈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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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면에서 바라본 평택 원균 장군 묘
 
 앞서 살펴봤듯 원균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결코 좋지 못하다. 그런데 여기에 옹호론과 같은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문중이나 평택시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성과 교훈의 역사로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 평택 원균 장군 묘와 통영에 있는 傳 원균 묘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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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통영에 전해지는 원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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