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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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 이틀을 넘게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자서신을 열어보고서도 일부러 답신을 회피하고 있었으니까요. 숙고를 거듭하다가 다시금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걸어오신 학문의 길을 존중합니다. 원격 강의 기간이 아니더라도 질문에 대한 답변은 교수의 책무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유감스럽게도 학생으로서 드린 문의는 법인의 정체성에 관한 사안입니다. 어쨌거나 이번 학기 남은 시간은 서로 품격을 갖춰 마무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탐구과정에서 정당한 문제제기를 부당하게 대응하시면 공론화를 거쳐보겠습니다. 본 신학원의 설립 정신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주의에 입각해 종교 다원주의자의 실체를 알고도 그냥 덮어두는 일은 기독교인의 양심에 반하는 배교행위라고 분별하는 사람이 올림” 그런데도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학생 주제에 감히 교수에게 대드냐는 식의 대응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나 역시 인간인지라 매우 화가 날뿐더러 차츰 참담한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긴급한 상담 요청입니다. 사실 그간 주임교수님 수업시간에 이상한 점이 있어도 참고 들었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자꾸 '기독교 말고 <좋은 종교>까지를 포함해서'라거나, 심지어는 다른 종교에도 <성육신의 교리>가 있다고 해서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리포트에 ‘좋은 종교’ 얘기를 짚고 넘어갔는데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표현이 좀 과하지만 수업시간에 아주 치졸할 정도입니다. 거듭나면 그리 못하는 수준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 정체를 안 이상 가만 있지 않고 공론화 과정을 거칠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이게 뭐하자는 것입니까? 끔찍하게 다른 종교에도 성육신 요소를 운운하다니 신대원에 종교 다원주의가 가당키나 합니까? 사탄이 바로 이때다 싶게 농간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논문은 꼭 교수님께 지도받고 싶은데 난감합니다. 메일로 답변을 바랐으나 계속 무시하고 있습니다. 재차 강하게 해명을 요구했지만 소식이 없습니다. 학생의 권리인 질문에 응답하는 건 교수의 책임이자 직무가 아닌가요?” 덧붙여 문제로 삼은 리포트에 밑줄을 그어 첨부파일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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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금세 답장이 왔습니다. 입학 전부터 반응이 무척 빠른 분이었습니다. “어제부터 비가 오는데, 먼 곳에서 장례예배가 있어서 어제 늦은 밤에야 메일을 보았습니다. 먼저, 조 선생님께서 열심히 수업에 임해주시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모습이 다른 학우들에게도, 제게도 큰 도전이 되고 감사가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한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의 내용을 잠시 보았습니다. 아래의 내용만을 가지고서는 제가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수업 전체를 제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정통 개혁신학을 공부하셨고, 석사와 박사 또한 그렇게 공부하셨습니다. 가르침이나 학생들의 평가 또한 항상 그래왔고, 학생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은 수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박사학위 학생들도 모두 한국에서는 보수며 개혁주의 계열에서 공부한 학생들이기에 선생님께서 우려하실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 되십시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에 딱 어울렸으니까요. 다만 사안의 심각성을 알렸는지 여교수로부터 뒤늦은 답장이 왔습니다. “질문에 답변 드립니다. ‘좋은 종교’라는 말을 제가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도덕적으로 보았을 때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답니다. ‘타종교에도 성육신이 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나와 남을 동일시 여기는 마음’, 예를 들면 ‘타자의 고통을 마치 나의 고통처럼 여기고 공감하는 요소를 종교들이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교수자가 사용하는 단어 혹은 용어를, 교수자가 말하는 전후 문맥 가운데서 파악하도록 노력해보시길 바랍니다. 전후 문맥의 고려없이 한 단어, 한 용어만 따로 떼어내어 그 단어에 얽매이다 보면 말의 진의를 놓칠 수 있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자적’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답변은 저급했고 상대를 무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교수 자신의 영적 상태와 지적 실태를 그대로 일러줄 필요를 강렬히 느꼈습니다. 다음은 친절하게 다듬어 보낸 이메일 내용입니다.
 

■ 프로필
 
-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이충동에서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감.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1년째 연재 중······.
 
※ 다음호(563호)에는 ‘한 교육철학도의 방백(傍白) - 일시적 변신자의 본색’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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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한 교육철학도의 방백(傍白) : 종교 다원주의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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