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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일제강점기의 평택교육 ⑦’
작성일 : 20-10-09 14:54    
사립 ‘노동야학교’ 1909년 개교 보름 만에 50여명 입학
 
입학시험 및 수업료 부담 강습소·야학 입학 학생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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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씨학원이 금릉학원으로 개칭된 기사(1902년 9월 3일) <출처 = 평택시사> 
 
◆ 사립 교육기관
 
1. 노동야학교(勞動夜學校)
 
 1909년 진위군 우편국 주사였던 유준흥이 사랑채를 고쳐 ‘노동야학교’를 세웠다. 개교 보름 만에 학생이 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훈도는 유준흥 외에 유정기·김정현 등이 교육했다. 진위군 일서면 마두리(현 서탄면 마두리)에 살던 이병철이 사숙(私塾)을 세워 수십 명을 가르쳤다.
 
2. 진동학교(振東學校)
 
 1910년 4월 17일 진위군 서정리 사립 진동학교 1회 졸업식이 거행됐다. 이때 졸업생은 갑반이 6명으로, 을반, 병반까지 있었다. 갑반의 6명 중 3명이 우등생이었다. 진동학교 졸업식에는 교장 김종환을 비롯한 찬성장·박기양, 경기도관찰사 김사묵, 진위군수 및 관내의 면장 16명이 참석하고 각급의 유지들과 지역민들 다수가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3. 진평의숙(振平義塾)
 
 1922년 7월 진위군 서남면 통복리 황창헙·서광필·윤창섭 등이 ‘진평의숙’을 설립했다. 학생 수는 약 50여 명으로 증가했고, 같은 해 8월 평택리 장로교회에서 ‘은평강습회’를 개설했다. 은평강습회는 1923년 1학기 때는 보통과 남녀 각 20여 명씩 모집하고 2학기 때 남자만 30명을 모집했다.
 
◆ 학원 교육기관
 
 사립교육에서의 학원·강습소·의숙·야학 등은 우후죽순으로 혼재돼 설립됐다. ‘교육 법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부족한 공립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립교육기관이 많이 생긴 것은 의무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입학시험과 수업료에 대한 부담이 있어 학원과 강습소 및 야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학생이 많았다.
 
1. 금릉학원(錦陵學院)
 
 조선 말기에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1824~1906)의 부인 구씨는 남편의 묘소가 있는 진위현 봉남리로 이주한 후 배움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1912년 ‘구씨학원’을 설립하고 교사를 초빙했다. 처음에는 2년제로 시작했으나 4년제로 전환하면서 명칭도 ‘금릉학원’이라고 개명했다.
 
 구씨 사망 이후 아들 심재후가 이어받아 해방이 될 때까지 운영했으나 폐교되고, 재학생들은 진위국민학교에 편입됐다. 금릉학원 건물은 지역 유지들이 주선해 당시 진위고등공민학교에 편입시켰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59호)에서는 ‘일제강점기 평택의 학원 교육기관’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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