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교육공간으로 명륜당과 기숙사 동재·서재 “전학후묘 배치”
 
건축은 익공양식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조선후기 건축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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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택향교 외경 <출처 = 평택시사>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 ‘평택향교’
 
 평택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1983년 9월 19일 지정됐다. 팽성읍 객사리에 건립 됐다. 평택향교는 조선 1413년(태종 13) 처음 지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불타 여러 차례 복구했다. 높은 언덕 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그 앞쪽에 교육공간으로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 배치를 따르고 있다.
 
 건축은 익공(翼工)양식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조선후기 건축양식이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강학(講學)공간이 앞에, 제향(祭享)공간이 뒤에 배치됐다. 1979년 4월 23일 당시 전교인 박세홍(朴世洪)이 유림의 협찬으로 복원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17세기 중엽에 중수된 대성전이다. 대성전에는 문성왕으로 불리는 공자를 비롯한 5성위,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명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명륜당은 19세기 말에 중수됐다.
 
 19세기 말 관아 건물의 중수는 서원 철폐와 관련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팔자지붕)이다. 지붕 처마 밑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꾸민 익공 양식이다.
 
 직제로는 주(州) 부(府)에는 종6품의 교두 1인을 두고, 군(郡) 현(縣)에는 종9품의 훈도 1명을 두어 교육을 담당했다. 교생은 부(府)와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都護府) 각 70명, 군(郡) 각 50명, 현(縣) 각 30명이 정원이었다. 평택은 현에 속해 30명 정원이었다. 교수관은 향시에 합격하거나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 있는 사람으로 선발했다. 15∼16세가 돼야 입학하고 교생들은 사역(使役)이 면제됐다.
 
 평택향교는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대성전만 복원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강학(講學)이 중단됐고, 주로 제향(祭享)기능과 의견을 모으는 일을 담당했다. 19세기 말 명륜당이 복원됐지만,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향교에서 교육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48호)에서는 ‘진위향교’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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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교육제도와 평택교육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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