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신라시대, 중앙정부 차원 교육 활발하게 진행 안 돼
 
고려시대, 평택지방 여러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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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균관 명륜당(조선고적도보, 1902)

◆ 삼국과 통일신라의 교육제도
 
 
 고구려는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한자교육을 중시하며 유학을 권장했다.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교관의 명칭은 박사(博士)였다. 태학은 중앙에 설립된 최초의 국립 관학교육기관이다.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사학(私學) 교육기관이 있었다. 경당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교육제도를 운영하고 독서와 활쏘기 등도 병행했다.
 
 백제교육은 유학에 관련된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전문기술직으로서의 역박사(曆博士)·의박사(醫博士)·와박사(瓦博士)·노반박사(露盤博士) 등 다양한 박사제도를 두었다. 백제는 일본과 교역하며 박사제도를 일본에 전파했다. 무령왕(武寧王)때 단양이(段楊爾)·한고안무(漢高安茂)가, 성왕(聖王)때 왕유귀(王柳貴)·왕유릉타·왕도량(王道良) 등이 일본에 건너가 유교의 경전을 전파했다. 농업기술·직조술(織造術)·의약·천문·지리·음악·미술·공예 등도 일본에 전수했다.
 
 신라시대 인재양성과 민중교화를 위한 화랑도(花郞徒)교육은 575년(진흥왕 37)에 국가적인 조직으로 편성됐다. 산천산하(山川山河)를 돌며 단체생활도 익혔다. 삼국은 저마다 특색 있게 중앙에는 관학(官學)을, 지방에는 사학(私學)을 편성해 백성들을 교육했다. 평택지방은 중앙정부 차원의 교육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불교 사찰에서 ‘불경’을 읽고 지도를 받는 정도의 교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찰에서 지역주민들의 교육활동을 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고려시대의 교육제도
 
 국자감(國子監)은 고려시대 관학 교육기관이며 개경에 설립됐다. 충렬왕 원년에 ‘국학(國學)’으로, 충렬왕 34년에 ‘성균관(成均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육과정은 유학 3과(국자감·태학·사문학)는 수학연한이 9년이고, 잡학 3과(율학·서학·산학)는 6년을 원칙으로 했다. 국자감 이외에 12도(徒)라는 교육제도도 있었다. 최충은 1053년(문종 7) 자신의 집에 12도를 설치하고 국자감을 능가할 정도의 우수한 교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예종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해 국자감을 지원하고 전국적으로 관학양성 진흥책을 펼쳐 12도는 국자감과 성균관보다는 한 단계 낮은 중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었다. 향교 시설은 국자감의 축소판이었고 문묘와 명륜당이 있어 유교 사당과 같은 성격을 지닌 형태였다. 고려 말기에는 서재(書齋)와 서당(書堂)이 등장했다. 고려시대 평택지방은 여러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안성천 북쪽에는 진위현과 영신현이, 남쪽에는 평택현과 경양현이, 진위천 서쪽에는 용성현과 광덕현이 설치됐다. 옛 용성현의 읍치로 추정되는 용성리의 비파산성, 평택현과 팽성읍의 내리와 옛 양성현의 원곡동 관동마을에 ‘향교 터’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47호)에서는 ‘조선시대 교육제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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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시대별 교육제도와 평택교육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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