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통일신라, 평택지역 한산주에 소속된 것으로 보여

고려시대, 평택에도 주현군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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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년에 제작된 진위현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통일신라
 
 신라의 군사제도는 6세기 이후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큰 변화가 있었다. 통일 이후 중앙핵심부대가 9서당(誓幢)이고 지방 중심부대는 음리화정(音里火停)을 비롯한 10정이다. 10정은 삼천당(三千幢)이라고도 했다. 지방의 중심지 주마다 1정씩, 가장 군(郡)이 많은 한산주(漢山州)만 2정을 배치해 국방과 치안을 담당했다. 10정은 도독의 관할 아래 있었다.
 
 평택지역은 통일신라시대에 한산주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에 설치됐던 남천정(南川停)이나 경기도 여주(驪州)에 설치됐던 골내근정(骨乃斤停)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에는 10정 외에 청주(淸州)·완산주(完山州)·한산주(漢山州)·우수주(牛首州)·하서주(河西州) 등 다섯 주에 설치된 기병(騎兵) 중심의 5주서(州誓)가 있었고 보병 중심으로 각 주에 두 개씩 배치된 만보당(萬步幢)이 있었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지방군은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이다. 주현군은 종래 호족들 지휘 하에 있던 광군(光軍)과 태조 때부터 도호부·도독부 등에 파견된 진수군(鎭守軍)을 모태로 형성됐다. 주현군은 교주도·양광도·경상도·전라도·서해도 등 5도와 경기지역에 배치돼 있었다. 평택 지방에도 주현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현군의 규모는 보병인 보승(保勝)이 8,601명, 기병인 정용(精勇)이 19,754명, 노동부대인 일품군(一品軍)이 19,882명으로 총 48,237명이었다. 핵심부대는 보승·정용이었다. 이들은 중앙군인 6위(衛)의 부대와 교대로 번상했고 주로 전투·방수(防守)·공역(工役) 등에 동원됐다. 1품군은 2·3품군과 더불어 주로 공역에 종사한 노동부대였다. 1품군 지휘관은 지방의 향리들이 임명됐고, 2·3품군 책임자는 촌장(村長)·촌정(村正)이었다.
 
 동계·북계 등 양계지역에는 주진군이 배치돼 있었다. 주진군의 핵심부대는 초군(抄軍)과 정용(精勇)·좌군(左軍)·우군(右軍)과 북계에서는 보창(保昌), 동계에서는 영새군(寧塞軍)이었다. 초군·좌군·우군에는 마대(馬隊)·노대(弩隊)가 속해 정예부대 역할을 했다. 보창·여새군은 보병부대다. 신기(神騎)·보반(步班)·백정(白丁) 등의 예비군대도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36호)에서는 ‘조선시대 군사제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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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통일신라·고려시대 군사제도의 변천과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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