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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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렇듯 무료한 시간과의 싸움이 사서라는 직책이 도리 없이 견뎌내야 하는 일상이라면 이건 분명 내 길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나에게는 야간 자율학습 지도업무가 주어졌다.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였던 근무시간이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로 변경된 터였다. 사서교사로서 상상했던 미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이 나를 억눌렀다. 그렇잖아도 평소 이런저런 사념이 많은 탓에 머리가 묵지근한데 곁에 두기 싫은 자격지심까지 덤으로 얹힌다면 더는 견디기 버겁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교직원들은 외부인 대하듯 데면데면하고 학생들마저 본체만체하기 일쑤니 혼미한 정신 상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을 수밖에. 가뜩이나 힘든 마당에 자존감도 아닌 자존심마저 상처를 받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끝내는 버릇장머리 없는 여학생을 체벌하는 일까지 겹치니 딱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를 두고 흔히들 진퇴양난이라던가. 이제는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석으로 내몰린 형국이었다. 만삭인 아내와 상의해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적어도 따분한 중등학교 도서관은 재빨리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발견한 사서직원 공채모집 광고들……! 국내 유수의 대학도서관하고 탄탄한 공기업에 지원서를 냈다. 둘 다 엄청난 경쟁률을 보인 가운데 전자는 영어와 논술을 거쳐 면접시험을 치렀고, 후자는 영어 대신 상식과 한문을 더해 최종 2배수 면접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대학 인사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데 썩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사표를 내지 않은 채 나오라는 첫날에 일단 하루 연가를 내고 출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면에 소름끼치는 호칭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응당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졸지에 ‘미스터 조’라고 통칭했다. 딱히 하는 일없는 사서장이란 자의 거들먹거리는 자세는 실로 가관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부서 분위기 파악이 될까 싶어 따라나섰더니 감히 어디라고 합석을 하느냐는 눈빛에 놀라 멀리 피해 앉았다. 더욱이 봉급 담당자의 설명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간의 경력 인정은 물론 병역 기간까지 호봉산입에서 제외한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명색이 대학도서관인데 우째(어찌) 이런 일이? 잘 알지 못하던 사립대학 직원의 열악한 처우가 한눈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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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도서관행을 그냥 말기는 좀 그랬다. 부임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한다는 핑계를 대고 사흘간의 말미를 얻어 깊이 고민했다. 최종 결론은 새로운 곳은 내가 몸담을 데가 아니라는 것. 그대로 붙어있기로 했다. 여기 남아서 하고팠던 국문학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했다. 실력을 쌓아 유능한 국어교사로서 교단에 설 작정을 굳혔다. 얼마 전 도서부원 아이들에게 김동인의 문학세계에 관해 들려줬을 때, 다들 재밌어 하며 귀담아 듣던 그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기분 좋은 영상처럼 좀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은 내게 신선한 활로였다. 하지만 일상을 거꾸로 바꾼 주독야경(晝讀夜耕)의 길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절대 부족한 수면시간은 고통이었다. 그때 2.0에 가까운 시력이 0.5까지 떨어졌다. 연일 과중한 책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전공 적성이 맞아 애면글면 버텨낼 수 있었다. 학점도 잘 나온 편이어서 세 번째 학기에는 전액 장학금을 타낼 정도였다.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막바지에 잔꾀를 부린 나머지 내 이름을 걸고 손수 논문을 쓰지 않은 채 학부를 졸업해버린 일이다. 남달리 이상(李箱) 김해경에 관해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인 연구를 남의 손에 떠맡기다니 그때를 떠올리면 한심스런 게으름으로 다가온다. 지금이야 일부 대학원도 논문 없이 졸업할 수 있으나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논문이 필수요건인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학업의 진척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덕분에 최종 합격자 3인에 뽑혀 곧바로 들어간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문제는 동료교사의 도움이 없이는 야간에 개설된 수강은 불가능하던 상황. 사과 궤짝을 사들고 윗분을 찾았고 흔쾌히 대타로 수고해준 손길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에게 은덕을 입은 바 크다. 동기 중 홀로 제 날짜에 석사논문이 통과되고 바라던 국어교사 자격증을 따낸 데 이어 곧바로 새 학기에 발령을 받은 건 실로 극적이었다. 꿈에 그리던 국어교사로 교단에 서던 날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애창곡처럼 ‘꿈엔들 잊힐리야’를 반복한들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국면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물고기가 물을 만난 형국이랄까. 비록 속속들이 아는 바는 적잖이 미흡했으되 하고픈 일을 하며 떳떳이 살아가는 홀가분한 처지에 하루하루 신나는 나날이었다. 뿐만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서울을 탈출해 전세금으로 어엿한 주택까지 마련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30호)에는 ‘교직생활을 돌아보며 - 교단을 톺아보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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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교직생활을 돌아보며 - 국어교사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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