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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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로부터 약 40여 년 전 제법 빛나는 뜻을 품고 선택한 전공이 이른바 도서관학이었다. 그 뒤 학문의 명칭은 문헌정보학이 되었다. 당시 내 뜨거운 가슴속에는 책 숲에 묻혀 사는 사서 역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작다란 고을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에 죽 머물면서 책 향내가 그리워 찾아오는 이들을 지혜의 보고로 안내하고, 알고 싶어 안달하는 지적 호기심을 그때마다 실컷 채워 주리라 마음먹은 결정이었다.
 
 나는 우리 과에서 몇 안 되는 남자였고, 전체 학생 중 주목을 받는 축에 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 때가 되면 학우들은 늘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들을 피해 높은 점수를 홀로 따내느라 숨바꼭질하던 못난이. 철들고 보니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짓만큼 한심한 작태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나는 그때 그들에게 얄팍하고 알량한 필기 공책을 선뜻 건네주지 못했을까? 어차피 선뜻 빌려주었다 한들 학점에는 별 영향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기를 쓰듯 점수를 뺐기지 않으려 얄밉게 굴었던 회한에 나는 이따금 쓴웃음을 짓곤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의 핵심에는 나의 추한 이기성이 있었다. 이를테면 미숙한 정황 파악이 빚은 소탐대실(小貪大失). 그 주연은 바로 나였다. 되돌아보니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속 좁게 노닐다가, 두고두고 밴댕이 속이 따로 없다고 욕을 먹은 셈이다. 불현듯 그 시절 기억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라치면 나도 모르게 낯빛이 붉어질 때가 있다. 일말의 자괴감이랄까, 놀라운 복원력이랄까? 한동안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자책감을 극복한 데는 거듭난 신앙심이 단단히 한몫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직장이 학교도서관이었다. 서울에서 네 개 학교를 거느린 커다란 학원이었다. 더구나 내가 부임할 곳이 인문계 여고라는 인사담당자의 말에 밤새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상아탑에서 구상한 이상을 안고 들어간 공간은 내게 이내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직원이라야 고작 둘. 허울뿐인 교감급 도서관장은 실은 사서과장으로 보직된 부장교사였다. 역사를 가르치느라 태반은 자리를 비웠으니 실제 상주하는 직원은 갓 들어간 내가 전부였다. 급조한 도서원부를 보니 뚜렷이 구축된 시스템으로 부를만한 업무 체계랄 것도 없이 이제 막 대출과 반납 정도를 어설프게 가동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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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가 이거다 하고 일러주는 역할마저 없이 혼자서 사서교사의 임무를 찾아 나서야 했다. 게다가 전담자가 부임한 시점에서 네 개 학교의 협력 교사들은 일제히 철수해버린 뒤였다. 기껏해야 재잘거리며 거드는 야간부 여상의 도서부원 너덧 명이 포진해 있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학교도서관에 사서를 배치한 곳은 극히 드물어 마땅히 어디 한 군데 물어보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었다. 아뿔싸, 고립무원에 처한 외로운 행진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참으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공이었다.
 
 실무를 겸한 학문이 거의 그렇듯이 학문의 전당에서 학술 용어로 배운 이론을 곧바로 실제 현장에 적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당하게도 깨알 같은 목록카드는 물론 서책마다 기록된 분류 기호마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전공자로서 학교법인의 중앙도서관 운영을 떠맡은 이상 제 할 일을 하긴 해야 했다. 어수선한 것들을 하나둘씩 챙기며 차근차근 매뉴얼을 만들어보리라 다짐하는 사이 몇 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줄곧 상위권을 유지했던 학점이 도시 무슨 소용인지 심란한 느낌마저 세게 들었다.
 
 지끈거리는 골치를 좀 식혔다가 오라는 전능자의 배려였을까? 느닷없이 꼬박 한 주간 일정의 예비군훈련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불과 보름 남짓 근무 뒤 허락 받은 휴가 아닌 휴가였다. 비록 예비군이긴 하지만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고된 훈련소 입소를 반기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훈련 장소는 서울 근교인 안양이었다. 지하철 첫차로 새벽같이 출정한 두 시간 반의 갈아타기는 좀 귀찮았으나 대충 때우는 후방의 도상훈련일 텐데 힘든 게 무에 있으랴. 소대별로 인원 점검을 마친 뒤 낡은 천막을 치고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예나 이제나 그놈의 신상명세서는 빠지는 법이 없었다. 거기서 나는 아주 독특한 체험을 기획했다. 내내 애써 과묵을 초월한 침묵을 사수할 것! 그 어려움을 묵묵히 실천한 대가로 나는 주위로부터 어느새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재밌게도 잔잔한 미소 하나로 빛나는 금메달을 따낸 터였다. 아마도 사이비 교주의 수법이란 게 엇비슷할 거라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28호)에는 ‘교직생활을 돌아보며 - 도서관을 떠나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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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교직생활을 돌아보며 - 허허벌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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