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1931년 병남면→평택면, 1938년 진위군→평택군 개칭

1953년 내무부고시 제100호 도시계획 적응 도시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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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택역에서 바라본 시가지 <출처 = 평택시사>
 
 1914년 3월 1일 충청남도 평택군과 수원군 일부를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 군청소재지를 현내면에서 병남면 평택리(현 원평동)로 이전시켰다. 1931년 병남면을 평택면으로, 1938년에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했으며, 평택면이 평택읍으로 승격돼 1읍 9면으로 됐다.
 
 1981년 송탄읍이 인구증가와 관할구역 확대로 송탄시로 승격되면서 평택군에서 분리돼 평택군은 평택읍·팽성읍의 2읍 7면으로 바뀌었다. 1983년 2월 15일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죽백리·청룡리·원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읍에, 용인군 남사면 진목리 일부와 봉명리 일부가 평택군 진위면에 각각 편입됐다.
 
 1986년 팽성읍이 평택군에서 분리됐고, 1987년 1월 1일 화성군 양감면 고렴리가 평택군 청북면에 편입됐다. 오성면 금곡리·안중리·학현리·삼정리와 청북면 덕우리·용성리·포승면 석정리 일부·현덕면 화양리 일부·인광리 일부를 분리하고 평택군 안중출장소를 신설해 1개읍 8개면이 됐다.
 
 1989년 안중출장소가 안중면으로 승격했고 1992년 4월 19일 팽성읍에 서부출장소를 설치했다. 1995년 4월 20일 진위면 갈곶리·청호리·고현리 일부가 오산시 대원동으로 편입됐고, 5월 10일 3개 시·군이 통합됐다. 평택역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평택읍의 도시형성을 역사적으로 보면 구한말에는 커다란 취락지가 형성돼 있지 않았던 지대였으며 현재와 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일 합방 당시부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평택리의 모습은 군청 청사가 있던 시가지 인근지역도 대부분이 전답이었고 변두리에 민가가 몇 호 있었을 뿐이었다.
 
 1930년까지만 해도 큰 연못, 넓은 습지, 저지대 등이 널리 펴져있어 글자 그대로 평택平澤이었다. 1938년 평택읍으로 승격됐고, 인근 각지 농산물을 비롯해 해산물, 기타 생활필수품들의 집산지로 시가지가 형성·발전했다. 시가지가 형성되는데 있어 미래를 내다보는 계획성 있고 발전적인 요소를 감안한 조직적인 도시계획은 아니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구 수천을 포용하는 작은 지역에 거대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시가지로 형성·발전시키는데 노력했다는 느낌은 있다.
 
 우선 소규모로 일차선 정도의 ㅁ자형 도로를 내고 도로 내 또는 주변에는 군청·경찰서를 비롯한 각 관공서와 상가가 들어섰으며 변두리에 일반주택이 세워졌다. 그러나 해방 후 1947년 대홍수로 수해를 입은데 이어 한국전쟁 당시 평택역 주변 비행기폭격으로 인해 시가지 내의 관공서를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완전히 폭파 또는 소실됐으며 변두리에 가옥 몇 채만 남았다.
 
 전후 복구사업에 따라 평택역사가 동쪽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여러모로 발전성이 있는 현재의 평택시가지에 자연적으로 인구가 밀집하게 되고 관공서와 기타 공공건물이 설치돼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게 됐다. 1953년 3월 2일, 내무부고시 제100호로 도시계획 적응 도시로 고시되면서 시가지의 발전모습과 성격을 규제해 의도적인 도시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도달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24호)에서는 ‘남평택지역 변천과정’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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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도시화와 평택의 발전과정 - 평택군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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