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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시공을 더럽힌 발자국’ <하>
작성일 : 19-12-20 13:12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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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 은유한 ‘진리’와 ‘당신’으로 대구한 ‘인생’과의 관계를 기(起)와 결(結)에 수미쌍관으로 앉혀놓은 시. 하지만 승(承)에서 무지한 당신은 온갖 잡념에 매달린 채 미처 도(道)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에 시적 화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뭇 세인들을 구제하려 든다. 이의 성취를 위해 인고(忍苦)하며 기다리는 나를 전(轉)에다가 대시인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곧, 모든 이들이 회자정리(會者定離)에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는 항칙(恒則)을 통해 잊어버린 절대자의 은혜에 동참하기를 내내 기대하고 있노라는 유려(流麗)한 구성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한낮,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넘쳐나는 시정(詩情)을 정돈하고 나오려는 찰나, 차라리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나았을 현판글씨가 보였다. 발길을 멈춘 채 잠시나마 복잡한 상념에 잠겨본다. 일해(日海) 전(全) 모씨의 필적이라고 알려주는 낙관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인위로 얼룩진 편액(扁額). 그 간판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 뽐내고 있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다 돌비석 위에 새긴 님의 글월을 쳐다본다. 검고 나지막한 대리석. 그리 크지 않은 자연석의 겉면을 조촐한 시비(詩碑)로 삼고 있었다. 아, 영욕으로 찌든 편제(扁題) 앞에 놓인 고고한 시 한 편! 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물끄러미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만해(萬海)와 일해(日海).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의 대치가 어디 또 있을까? 오호, 독립운동가, 사상가, 시인으로서 일세를 풍미하며 일제 앞에 끝까지 민족적 양심을 지켜낸 빛나는 인물과, 사리사욕에 젖은 나머지 양심에 하등 거리낌조차 없이 무차별 하극상을 저지른 부끄러운 군인과의 적나라한 병치(倂置)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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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담사 <출처 = 백담사 홈페이지>
 
 정녕 암울한 식민지에서 애오라지 나라의 독립만을 고뇌하며 뼈를 깎던 수도장을 이토록 분별없이 더럽혀도 된단 말인가. 백담사에 얽히고설킨 국난사(國難史)의 무상함이라고나 할까? 실로 슬프도록 놀라운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필자는 학생들을 대하며 언필칭 한용운 선생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본질을 ‘희생’으로 설정하고, 이를 스스로 실천하면서 대자대비를 드높이 외치신 분이라고 가르쳤던 생생한 기억이 있다. 즉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궐기해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기초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처박히듯 투옥됐을 뿐더러, 일제의 끈질긴 회유에 맞서 득달같이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당국에 제출함으로써 끝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할 뜻을 밝히다가, 야속하게도 해방을 앞둔 해 그만 험한 세상을 뜨고 말지 않았던가!
 
 하여 백담사만큼은 그 분으로 하여금 내가 즐겨 읽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가다듬게 한 유구무언의 도량[道場]이었기에, 여타 식객 따위가 섣부른 일설로 더럽히지 못할 엄숙한 필방으로 내내 남아있기를 원했거늘....... 나는 비록 선시(禪詩)에는 문외한이로되 각 연의 행간에서 풍겨나는 어휘의 청량한 향기만은 너무나 좋아하기에, 여태껏 백담사의 한켠에 그대로 묻어있는 그의 시적 체취를 못내 아쉬워하며 씁쓸히 돌아서야 했다.
 
 절을 총총 빠져 나오며 나의 예민한 정서에 틀어박힌 절절한 감상을 힘껏 추슬러 본다. 농익어 아려(雅麗)한 기분을 오롯이 보전하려는 몸짓일까? 나는 모처럼 해맑은 동심으로 돌아가고팠다. 맑디맑은 냇물로 뛰어 들어가 매끄러운 징검다리를 뜀뛰듯이 밟으며 건너가고 싶었던 참이다.
 
 천연기념물인 어름치와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을 만치 깨끗하다는 일급 시내. 때 묻은 신짝을 벗어 던지고 넘실대는 시냇물에 첨벙 두 발을 담그니 대뜸 한 움큼 손아귀에 쥐어 탁한 목구멍에 애써 흘려 넣지는 않았으되, 청아한 골짜기의 시원한 물맛이 이내 여린 속살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스며든다.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마친 연수 행렬은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가 점점 엷어갈 즈음, 사랑하는 처자가 기다리는 그리운 집을 향해 바지런히 가벼운 발길을 재촉했다.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24호)에는 “운동과 함께 사색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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