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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치기와 의기 ‘꽤나 유치한 소행들’ <상>
작성일 : 19-11-08 15:11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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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비린내 나는 치기(稚氣)를 제법 의기(義氣)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좁혀 보면 장난기이고 넓혀 보면 죄성(罪性)일 텐데, 막상 성년이 되어서도 개구쟁이 때 하던 짓을 냉큼 떨쳐내지 못했다면 이는 분명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의식의 개울 한구석에서 해묵은 물때처럼 하늘거릴 때마다 하나님 없는 삶이란 언제고 깊은 나락의 수렁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음을 새삼 탄식하며 되돌아보곤 한다. 딴엔 그 앙금 같은 찌꺼기마저 말끔히 씻어내고픈 뜻에서 어렵사리 이 글월을 남기기로 했다.
 
 꼬르륵꼬르륵 배를 곯던 시절 학교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며 주인 몰래 슬쩍 덤을 얹어먹은 동영상이 떠오른다. 그 못된 버르장머리는 훗날 병영으로 이어졌다. PX매점 간이창문을 열고 졸고 있던 졸병이 나오는 사이 입안에 얼른 사탕 하나를 물고 시치미를 뚝 떼곤 했다. 반면에 담대하게 용기를 낸 일이 있었다. 쥐꼬리만한 병사 월급을 적금을 핑계로 왕창 떼먹으려는 주임상사를 향해 통 크게 경고 서한을 보냈다. 문제는 내가 모신 작전참모의 그럴싸한 사인을 곁들인 나의 잔머리에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뒤덮으려했는지 그 술수를 뻔히 알면서도 인편에 슬그머니 돈 봉투를 보내왔다. 그걸로 선심을 쓰듯 부서 회식을 하며 으쓱했던 기분은 치기어린 의기였던 것 같다. 스스로를 대견해한 일도 있었다. 제대 직전 어렵사리 외출을 나와 부득불 짊어졌던 외상값을 갚았다. 희한한 듯이 쳐다보며 거푸 고맙다던 경상도 아줌마의 눈빛이 눈에 삼삼하다.
 
 예전에 때 묻은 동전을 따먹는 놀이가 있었다. 땅바닥에 그은 금 안에 엽전을 던져 상대방 것에 업히는 대로 가져가는 일종의 현금 박치기였던 셈이다. 남달리 손끝이 매워 시나브로 푼돈을 땄고 호주머니가 묵직해지는 재미를 느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동네 어른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흐지부지됐지만 그 치기는 북적거리는 서울 길거리에서 불거졌다. 백주대낮에 좌판을 깔고 바둑돌로 내기를 거는 꼬임에 걸려들고 말았다. 눈뜨고들 당했으나 심증은 있고 물증이 없는 전형적 속임수. 졸지에 잃어버린 돈이 아까워 짐짓 소란을 피워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쓸쓸히 돌아섰던 기억이 선명하다. 큰소리를 치면 주위에 사람이 모여들 거고 그러는 사이 경찰이 달려와 해결해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 나름 치기를 의기로 둔갑시켜보려던 못난 근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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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에 얽힌 뒷얘기를 들었다. 외조부가 사주를 보니 신변에 물이 귀해 ‘하식(물 河, 심을 植)’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내 호적은 무속적 사고에서 비롯한 터였다. 그래선지 이름 석 자에 줄곧 열등감을 품은 적이 있었다. 맘에 안 드는 이름에 들불을 지른 아이가 있었다. 고교시절 공부깨나 한다는 녀석이 자꾸 나만 보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비식거리는 게 아닌가. 몇 차례 기분이 상한 끝에 왜냐고 다그치니 약 올리듯 묵묵부답. 급기야 녀석을 닦아세웠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까닭인즉 자기 동네에 같은 이름을 가진 바보가 산다나, 뭐라나? “얀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빨리 사과해!” “그래 정말 미안하다.” “짜식,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꽤나 투박한 대처였으나 그만치 당당히 문제를 푼 전례는 없었다. 그런대로 치기보다는 의기를 앞세운 일처리였다.
 
 고2 가을날 이른 아침 자전거를 빌려 멀리 남양만으로 향했다. 급우 다섯 명이서 코스모스 핀 한길을 따라 힘껏 내달리니 뭇 여성의 시선을 끌었다. 한껏 멋있어 뵈려는 치기들이 저마다 발동한 터였다. 목적지인 상묵이 고모네를 찾지 못해 하염없이 헤맸던 고행이 생생하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집을 겨우 찾았고 설익은 밥알을 채 씹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삼키기에 바빴다. 곧바로 돌아서 부랴부랴 길을 재촉했어도 훌쩍 통금을 넘기고 말았다. 가까스로 단속의 손길은 벗어났으나 골목을 지키던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지난해 여름방학에 들른 예산의 한 교정에서와 엇비슷한 양상이었다. 어설픈 양아치 몇이서 선량한 학생들을 붙잡고 큰소리치는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토록 한 건 나의 주도였다. 도망치듯 뒷걸음질했지만 일단 충돌을 막은 임기응변을 두고 딱 잘라 의기나 치기로 나누지는 못하겠다.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19호)에는 ‘치기와 의기 - 깨닫고 보는 분투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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