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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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가 엄마를 보고 칭얼댔다. 아닌 게 아니라 출출할 시간대였다. 자동차를 몰아 한 초등학교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여행의 식사는 이런 식이었다. 한적한 배움터만큼 먹고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따금 일직 교사로부터 참견을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처소보다는 백 번 낫기에 양해를 구하곤 한다. 고소한 김밥이며 제철 과일에 저마다 선호하는 음료수로 빈 뱃속을 채우고 나면 더없이 행복하다. 여행의 묘미라는 게 사실 이런 게 아닌가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밀린 대화를 나누고 흔히 접할 수 없는 별식을 맛보는 일. 그리 두루 돌아다니면 기분이 이리 상큼한 것을!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의 핵심은 ‘해미읍성’ 산책.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한들 그 성곽둘레를 어이 걷지 않으랴. 조선왕조에 축성된 석성(石城) 중 보존상태가 가장 원형에 가까워 사적 제116호로 지정했다는 걸 몸소 체험하려는 듯 우리 넷은 성벽 위를 따라 산보(지금은 성벽 보호를 위해 전면 금지된 상태)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비켜지나가기도 좁은 편이었지만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원래 높이가 5m라지만 평성인데다 그동안 주위에 흙이 쌓이다보니 불과 3m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쌓아올려 서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던 곳. 2백년의 지난(至難)한 역사를 담은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다. 무려 천 명의 신도가 무참히 처형을 당하는 등 남달리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해온 해미읍성의 면적은 약 6만여 평, 둘레는 총 1.8km에 달했다.
 
 이 성곽을 한때는 ‘탱자성’이라고도 불렀단다. 까닭인즉 성안으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주변에 가시가 촘촘히 박힌 탱자나무를 빼곡히 심었고, 그 앞쪽으로 큰 웅덩이를 파놓아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그 해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재밌는 건 선조 12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군관으로 이곳을 지켰다는 사실. 한가운데 위치한 감옥 입구에는 회화나무 또는 호야나무로 불리는 300년 수령의 노거수(老巨樹, 오래된 거목)가 서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다는 바람에 가지에는 아직도 철삿줄이 박혀있었다. 걸으면서 살피니 내부에는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했고, 성벽 위쪽을 일부러 뾰족하게 만들어 적들이 쉬이 담장을 타고 넘지 못하도록 만든 점이 특징이었다. 중간에 가파른 계단을 치고 올라가니 아담한 정자가 나타나 걸터앉아 쉴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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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제공 = 서산시청> 
 
 한 시간 남짓을 공들여 돌아 나오며 다시금 읽어본 입간판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본시 ‘해미(海美)’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불린 것으로, 그 이전에는 “해뫼”라 하여 ‘해 뜨는 산’이라 했었단다. ‘해뫼와 해미’는 정확히 따져보면 홀소리 한 끝 차이로되 한 음절의 한글 모음과 뜻글자 한 자의 한자(漢字)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셈이다. 굳이 위안을 삼는다면 ‘뫼’보다는 ‘미’가 더 발음하기에 편안하므로 시대 변화에 따라 언어의 가역성을 증명하듯 간이화(簡易化) 현상의 일단을 역사의 현장에서 확인한 참이다. 음미하면 할수록 못내 아깝다는 느낌을 발밑에 묻어둔 채 기대하는 안면도로 향했다.
 
  그런데 서산을 통과하자니 웬일인지 차가 막혔다. 안면도까지 예상보다 반시간은 더 걸리는 바람에 중천에 떠있던 해는 정수리를 비껴 서산으로 기운 듯했다. 첫눈에 온통 소나무 천지. 좌우로 솔숲밖에는 통 뵈는 게 없을 정도였다. 싱싱한 소나무들로 뒤덮인 산자락.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소나무들이 지금보다는 작아 더 예쁘장했다. 섬 전체가 삼림욕장. 비교적 잘 된 식물자원 보존에 합격점을 주고 싶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개발 열풍이 도를 지나치더니 열병처럼 휩쓸고 가는 통에 소중한 국토는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어 걱정이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울창한 자연휴양림마저 심한 몸살을 앓는 중이라는 보도가 잇따르니 말이다. 섬 전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안면도만 해도 여러 해수욕장을 비롯해 연안 및 해안 사구 등이 형편없이 훼손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12호)에는 해미읍성에서 안면도까지 ‘해송을 키운 안면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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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해미읍성에서 안면도까지 ‘원형에 가까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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