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시가 있는 풍경.jpg
 
권혁재 시인
 
 
세상을 향한 나름대로의 강한 무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음을
공 대리의 근속 15주년 회식자리에서 알았다
축하의 술잔이 돌고 덕담이 끝나고
인사말을 해달라는 요청에 공 대리는
빈 잔에 자작으로 술을 따라 들이켰다
목줄기를 훑으며 술 넘어가는 소리가
대답처럼 들리고 이미 위장을 점령한 술은
그의 눈가에서 최루로 따갑게 맺혔다
잠시 그것뿐, 이내 그의 입은
술과 함께 봉쇄되었다
직원들이 재촉하는 성화에도
그는 아그리파의 눈빛과 굵은 턱선처럼
더욱 입을 꽉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침묵으로 시위를 하는
공 대리의 슬픈 근속 15주년 날
막내의 학원비를 벌어보려고 푼돈으로 사 둔
주식과 펀드는 깡통이 돼 버렸다
미워할 수 없는 공 대리의 묵비권에
우리도 거룩한 묵비권으로 동조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 하나씩을 두르고
우리는 결의를 하듯 술잔을 들어 부딪쳤다.
 
 

■ 작가 프로필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집 <투명인간> <고흐의 사람들>외 저서 <이기적인 시와 이기적인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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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묵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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