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평택지역, 갑오개혁 이후 진위군·수원군·평택군으로 정리
 
1919년 경찰행정 독립 과정에서 평택경찰서로 명칭 변경
 
 
평택시사.jpg
▲ 일제강점기 평택군청 터(2013)
 
■ 원평동 평택군청 및 평택경찰서 터(원평로 59번길 일대)
 
 평택지역은 갑오개혁(1895) 이후 진위군·수원군·평택군으로 정리됐다. 1914년 세 지역을 통합해 진위군을 설치했다. 본래 진위군의 중심은 진위면 봉남리였지만 일제는 교통이 편리하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병남면 군문리에 군청(郡廳)을 신설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폭격으로 군청과 경찰서가 불에 타자 본정통의 평화병원이 임시 군청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 2월 철도 동쪽 비전1동에 군청을 신축 이전했다.
 
 평택경찰서는 1910년 수원헌병대 평택분견대가 설치되고, 1914년경 경기도 경무부 산하 진위경찰서가 설치되면서(총독부 직원록에 1914년부터 직원명단이 나타남) 시작됐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했다. 조선주답헌병조령(朝鮮駐掘憲兵條令) 칙령 343호에 따라 헌병이 군인신분으로 일반치안업무를 담당 했다.
 
 총독부 경무총감은 주한헌병사령관이 맡았고, 각 도의 경무부장은 해당 도(道)에 파견된 헌병대장이 담당했다. 1910년 각 도 경무부장 아래에 헌병기관이 640개, 경찰기관이 480개가 설치되고, 헌병은 2,109명, 경찰관은 5,693명이 배치됐다. 경기도에는 수원 헌병대가 있었고 평택지역에는 분견대가 설치됐다.
 
평택시사2.jpg
▲ 일제강점기 평택세무서 터(2013) 
 
 평택지역에는 수원헌병대 평택분견 대와 진위경찰서가 함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초기 진위경찰서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고, 1919년 경찰행정의 독립 과정에서 평택경찰서로 명칭을 바꾼 뒤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택경찰서는 원평로 59번길(평택단 위농협 원평동 지점 서북쪽)에 있었다. 당시 경찰서는 진위군청과 등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위군청 입구가 동쪽에 있었다면 평택경찰서 입구는 서쪽에 있는 형태였다.
 
 평택경찰서는 1950년 7월 원평동 일대가 유엔군 폭격으로 건물이 파괴됐다. 수복된 뒤 원평동 평화병원 건물 등을 전전하다가 1953년 12월 26일 비전동으로 이전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01호)에서는 ‘옛 평택역 광장 터와 세무서 터’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82328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평택시史로 보는 ‘1920~1950년대 군청 및 경찰서 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