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신라 이후 진위현 명칭 사용, 태조 7년 충청도→경기도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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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각 도의 연혁과 총론·관원을 적은 후, 목·부·군·현의 연혁,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관방(關防)·봉수·누정·학교·역원·교량위치·불우·사묘·능묘·고적·명환(名宦)·인물·시인의 제영(題詠) 등의 순서로 기록돼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이다. 인물에는 효자·열녀가 포함돼 있다. 군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특히 강조된 내용은 연혁·성씨·산천·역원·고적·인물 등이다.
 
 연혁에서는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 행정구역 변천 과정 등을 밝히고 있다. 성씨는 토성(土姓)·내성(來姓)·속성(續姓) 등으로 구분해 기록했고, 역사상 유명한 학자·고승·충신·무장·효자·열녀 등을 다룬 인물조와 관계가 깊다. 산천조는 명산·하천·바다·호소·나루터 등의 위치를 읍을 기준으로 거리와 방향을 기록했으며, 시문으로 과거의 경관을 묘사했다. 역원제와 봉수제는 왕명의 전달, 긴급 군사 정보의 송부, 공무 여행자와 관물 수송 등 전제군주제 하에서 행정상의 중추신경 구실을 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됐다. 봉수와 역원의 위치는 읍을 중심으로 방위와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역은 찰방역과 일반역으로 나누었다. 찰방역의 경우 그 소속 역명을 열거했으며, 주요 역원은 그 시설과 연혁 등이 기술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책 안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평택도 진위현과 평택현이 중심이다. 진위현은 동으로는 양성현(13리), 서로는 수원부(12리), 남으로는 직산현(37리), 북으로는 용인현(33리)을 경계로 했으며, 서울과는 118리 정도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은 고구려 부산현, 연달연곡, 금산, 송촌활달 등 옛 지명과 신라 이후 진위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태조 7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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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진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관원으로 종 5품의 현령 1인, 훈도 1인이 있었고, 성씨로는 진위현에 김·이·유·최·송씨 등 5성이, 영신에는 김·최·오·황·이씨 등 5성, 송장은 이·유씨 등 2성이 토성이었다. 형승은 남과 북으로 길이 통했으며, 3도의 요충이 되는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산천으로는 동쪽의 부산(釜山), 무봉산, 천덕산 등 3개의 산이 있으며, 강은 남쪽으로 장호천이 흘렀다. 진위현의 토산품은 붕어, 게, 지황(地黃) 등이었다. 궁실은 객관, 누정으로는 부산정, 학교는 향교, 역원은 장호원·이방원·백현원·갈원, 불사는 만기사, 사묘는 사직단·문묘·성황사·여단, 고적으로는 영신폐현·송장부곡·천장부곡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은 진위현에 편입 폐현된 영신현, 송장 부곡, 천장부곡을 고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영신현은 원래 양성현에 속했는데 조선 태종 때 수원부에 속했다가 세종 15년 진위현에 속하게 됐다. 송장부곡은 수원부에 속했다가 세종 6년 진위현에 속했다.
 
 평택현은 동으로는 직산현(10리), 남으로는 아산현(8리)과 천안현(2리), 서와 북으로는 수원부(각 20리와 10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과는 124리 정도 떨어져 있다. 건치 연혁은 고래(古來)로부터 하팔현으로 천안부에 속했다가 태종 13년 현감을 두는 독립현이 됐다. 관원은 현감과 훈도 각 1명을 두었고 연산군 때 경기도에 잠시 속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환원됐다.
 
 토성은 이·임·전·손·박씨 등이다. 산천은 성산(城山), 오을미곶포(五乙未串浦), 시포(市浦), 신덕포(新德浦) 등이 있었는데, 포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토산품으로 붕어·숭어·지황 등이 있다. 누정은 객사 북쪽에 있는 관가정, 향교, 역원으로는 화천 역과 상원이 있었으며 사묘는 사직단·문묘·성황사·여단 등이 있다. 고적으로 백량부곡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은 효자 박영(朴寧), 박서생(朴瑞生)·노숙동(盧叔仝)·서거정(徐居正)의 제영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482호)에서는 ‘지리지와 지도 - 지리지에 나타난 평택’ 네 번째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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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지리지와 지도 - 지리지에 나타난 평택’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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