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칠천량 해전’ 패배가 원균 한 사람의 잘못이라는 점 동의 어려워
 
조선 수군 2만 희생, 지휘관으로서의 심각한 자질 문제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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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 흔히 역사를 두고 해석의 학문이라고 한다. 이는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가치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자나면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측면에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의 해석이 달라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가령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떠올릴 만큼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여기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는 아예 ‘삼천궁녀 의자왕’이라는 노랫말로, 확인사살까지 했다. 그 결과 의자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멀리한 암군으로 급전직하하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평가는 온당한 것일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천궁녀의 이미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날조된 기록으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당대의 어느 기록에서도 등장한 바 없다. 이러한 의자왕의 사례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라의 경애왕은 어떠한가? 비교적 잘 알려진 ‘포석정’의 비극을 통해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침공하는데도, 한가롭게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죽은 한심한 왕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경애왕의 평가 역시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역사는 해석의 학문이라는 명제 앞에 시대의 관점과 흐름, 가치관 등에 따라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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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저수지에 소재한 원균 장군의 묘 
 
■ ‘원릉군 기념관’ 건립으로 보는 원균 장군의 재평가 논란
 
 지난 4월 16일, 평택시 도일동에 자리한 원균 장군(이하 원균)의 묘 인근에서는 ‘원릉군 기념관’의 개관 행사가 열렸다. 이날 개관식에서 원주원씨대종회의 원유철 회장은 원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며 그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평택시를 비롯한 평택의 지역 언론 역시 이러한 소식을 전하며,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기대하는 대종회의 입장을 반영했다. 물론 역사는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 혹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원균이 재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인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순신이 파직당한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을 통해 그나마 왜(=일본)에 비해 나은 전력을 갖춘 조선 수군을 와해시켰다. 원균의 패전으로 수많은 전함과 조선 수군 2만이 희생된 점은 지휘관으로서의 심각한 자질 문제와 함께 무능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결과다. 이로 인해 우위에 있던 남해안의 제해권이 상실되며, 왜의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시대의 관점과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 같은 패전의 책임자인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논하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상식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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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면에서 바라본 원균의 묘
 
■ 평택의 과도한 영웅 만들기, 왜 하필 원균인가?
 
 국가의 공식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관의 평가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순신과 원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원균의 재평가에 근거가 되는 <원균행장기>는 가문의 입김이 작용이 된 것이니 기록으로서의 신빙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이가 나쁜 당사자들의 기록인 <난중일기>나 <원균행장기>의 기록을 제외하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야사 격인 <연려실기술>, 당대의 문집 등의 기록을 교차분석해보면 원균에 대한 평가가 당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다. <중략>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1년(1598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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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본 원균 사당의 모습 
 
 이와 함께 선무 1등 공신이 원균의 공이 아니냐는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을 조금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애초에 원균에 대한 공신 책봉은 2등이었는데, 이를 뒤집은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선조는 이순신, 권율과 함께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올렸는데, 이에 대해 조정에서 논란이 일자 다른 공신들을 삭제하더라도 이순신과 권율, 원균 만큼은 1등 공신이 되어야 한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었다. 따라서 원균의 공을 인정해서 1등 공신이 되었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또한 객관적인 공적을 따져도 이순신과 권율에 비길 정도로 원균이 공을 있다고 보기 어렵기에, 원균에 대한 1등 공신은 선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행동이자 이순신에 대한 견제 심리였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전제할 점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가 원균 한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 출전을 압박했던 선조와 조정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실제 원균이 수륙 합동을 요청하는 장계를 보냈다는 점을 보면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와해되며 나라가 망국의 위기까지 갔다는 점에서 원균은 재평가가 아닌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 때문에 원균의 이름이 회자될수록 그에 반비례해 비난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논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평택의 과도한 영웅 만들기가 불러온 ‘원릉군 기념관’의 개관을 두고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논하며, 스스로 자축할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반성과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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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원릉군 기념관’ 건립, 역사의 교훈인가? 재평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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