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이건일(평택남부노인복지관 과장)
 
 
이건일의 복지탐구.jpg
 미국화폐 100달러에 등장하는 인물 벤저민 프랭클린은 “거래는 일반적으로 노동과 노동의 교환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물건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정확히 측정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사람살이에는 거래가 발생하고 그 거래의 근본은 노동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의 노동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이라는 말자체가 불편하지는 않은가? ‘노동절’이라는 말이 불편하여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날이라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바꾸어 말할 정도이니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노동이란 단어의 숨은 의식은 왠지 모를 거부감이다.  
 
 노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의미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노동은 물건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행위다. 지푸라기는 지푸라기 자체로 존재하지만 여기에 노동이 들어간다면 다양한 형태의 생산물이 나온다. 짚신, 복조리, 가방, 멍석 등이다. 노동을 더해 팔 수 있는 물건들이 만들어 지고 이러한 과정에서 상품의 가치가 발생한다. 더 높은 상품의 가치를 갖게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이나 고급 기술의 노동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비싸게 사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원재료에서 사람의 노동력이 아주 많이 들어갔다는 의미다. 노동력이 들어가지 않은 것! ‘바람’과 ‘햇살’, ‘공기’같은 것에 돈이 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상품의 가치에 노동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노동은 노동자의 몫이다. 그리고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노동이라는 상품을 산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만들어낸 가치 있는 상품의 금액만큼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3세계 아이들이 축구공을 만들지만 그 축구공만큼의 가격이 노동을 한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 휴버먼의 자본론에서는 이처럼 노동자가 임금을 받는 것과 그가 생산한 상품의 가치 사이에서 나타난 차이를 바로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한다.    
 
 잉여가치가 발생되면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협력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분배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는 돈이 고용주의 몫이 된다. 즉 잉여가치 자체가 고용주의 이윤이 된다. 잉여가치가 많다는 것은 고용주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많다는 것이고, 잉여가치가 적다는 것은 노동자의 몫이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실이 온전하게 자신의 몫으로 돌아갔던 아주 먼 옛날에는 ‘잉여가치=노동자의 것’이었다. 계급이 생기고, 산업화가 되면서 잉여가치는 지배계급이나 고용주에게 더욱 많이 돌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그들의 판단에 따라 노동자에게 필요 이상의 임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알기에 더 많은 임금을 원한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것만이 절대적인 방법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언제나 투쟁과 운동을 통해서만이 노동자들의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말이다.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고는 좋은 것을 누릴 수 없다. 좋은 것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다. 따라서 좋은 것은 모두 노동을 투입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각각의 노동자에게 가능한 그의 생산물 전부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 좋은 정부의 가치 있는 목적이다.”
 
 좋은 정부는 노동의 진짜 가치를 인정하고 잉여가치가 가능한 노동자에게 많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에 대해서 스스로가 진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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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일의 복지탐구] 잉여가치로 보는 노동의 진짜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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