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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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 소설가를 자처하는 김정현은 같은 부류 안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끄집어내고 서술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도들이 긴긴밤을 부옇게 지새우고 있음을 똑바로 직시하시라. 문학이란 업(業)으로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순수한 열정들을 당신은 더럽혔다. 그대는 고단한 수련을 거듭하며 작가를 꿈꾸는 이들의 정당한 몫을 가로챘다. 남세스럽게도 “항상 의연한 듯 우뚝 선 아버지의 내면에 숨겨진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통해 진정한 아버지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라는 감언이설을 내세워 힘겨운 시대의 아픈 아버지들을 농락했다. 가증스럽게도 당신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과다한 수입을 홀로 챙겼다. 마치 때를 만난 듯 잽싸게 아버지라는 존재를 내세워 빗나간 아버지상을 오염시켰다. 그대는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부권상실의 시대 상황에 편승해 작가다운 작가에게 돌아가야 할 피 같은 인세를 가로챈 것이다. 이런 황당한 사태를 두고 필자는 감히 무지몽매한 독자들로 인해 일어난 참사로 규정하거니와 자발적 독자들이 참여한 자생적 정신세계의 발로쯤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명백한 것은 유사소설 <아버지> 같은 저작물이 일시에 공중부양함으로써 현세에 지레 세기말적인 점멸등이 깜빡거렸다는 점이다. 즉, 지나친 비약인지는 몰라도 그 어마무시한 폐해를 소환하면 신음하는 소시민들에게 적신호를 보냄으로써 그나마 몇 개 남아있던 청신호를 깡그리 도말(塗抹)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우직한 아버지의 도덕심을 짓이겼고, 정결한 여인들의 순정을 짓밟았다. 김정현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그 고풍스러운 성채(城砦)에 시커먼 먹칠을 해댄 참이다. 어찌 그리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도도할 수 있는가? 어이하여 순박한 서민들을 그처럼 기만하고도 이리 뻔뻔할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필자는 그가 언젠가 공영방송(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나와 의기양양 내뱉은 몇 마디의 어쭙잖은 말을 우연히 엿들은 기억이 있다. 추락한 아버지의 위상을 살릴 묘안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쟁쟁한 패널들과 의견을 개진하는 가운데 필자의 예상치대로 배부른 김정현은 거들 말이 거덜나 몹시 궁색한 얼굴로 몹시 심란해하고 있었다. 그렇듯 불건전한 사고의 소유자가 ‘우리의 아버지’를 논하는 마당에 불건강한 목소리로 무슨 할 말인들 있었겠는가마는, 그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어야 마땅하다. 다수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은 얼마간 이어갈 수 있으나 소수의 글과 입을 꿰매는 일은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대중의 진실한 아픔을 외면하며 유지하는 작가의 가식과 위선은 그리 오래지 않아 탄로 나는 법이다. 그대가 진정 두려워할 채찍은 작가란 이름 앞에서 내려질 문학적 심판임을 명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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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리디북스 갈무리>

  아시다시피 작가가 공개하는 저작들은 발표하는 순간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난다. 갈고 다듬어 작품에 언급한 내용은 발표와 동시에 독자들이 마음껏 읽고 저마다의 의견들을 피력할 자유를 얻는 참이다. 그런 맥락에서 공들여 이 ‘비평적 수필’을 쓰는 사람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갖지 말고 꼼꼼히 읽어주기 바란다. 아울러 내게 주어진 깜냥이라는 것이 출중한 작가적 소양에는 크게 미달한다는 점도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 필자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었더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타고난 재능이 이뿐이니 조촐한 글로써 표현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다. 다만 오랜 기간 교단의 최일선에서 문학을 가르친 교사로서 학생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점은 자부한다. 그 교육적 자산을 딛고 내심 용기를 내어 사심 없이 이와 같은 묵직한 문제를 꺼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이를 사족처럼 굳이 언급하는 목적은 어떤 부당한 비난에는 저마다 앞다퉈 핏대를 올리면서도 정당한 비판문화에는 익숙지 못한 우리네 풍토를 보며 심히 잘못되었다는 전제에서 어렵사리 드리는 말씀이다. 단지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퍽 곤혹스러우나 혹여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실한 채 비판을 위한 비판을 토설(吐說)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까 보아 부연하는 설명이거니와 오로지 문학다운 문학을 일구겠다는 일념으로 쓰는 글이오니 독자마다 밝히 변별하여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오호, 애재(哀哉)라. 이 땅의 순백한 문학이여!” 굳이 뻔뻔한 자를 앞에 두고 ‘필자의 변(辯)’이라는 소제목을 붙이기도 아깝지만 부디 때가 되어 저작의 실상이 세상에 가감 없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599호)에는 밀리언셀러 <아버지>의 흉상 ‘집에 기대 재충전할 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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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밀리언셀러 의 흉상 ‘뻔뻔한 눈과 필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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