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김희태 증명사진.jpg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여인이 왕위에 오른 사례가 있는데, 이는 오직 신라에서만 확인된다. 주인공은 바로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진성여왕(眞聖大王, 재위 887~897)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왜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骨品制)를 이해해야 한다. 골품(骨品)이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뼈에 새긴 신분, 즉 혈통을 의미하는데 신라는 이러한 혈통이 곧 권력이었던 사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혈통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직에 제한이 있었는데, 제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한번 타고난 신분은 바뀌지 않았다. 가령 A라는 인물의 능력이 없더라도 진골(眞骨)인 경우 최고 관직인 각간(角干)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고, B라는 인물은 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6두품일 경우 아찬(阿飡)의 관직 밖에 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와 관복의 색 등이 달랐다. 요즘의 표현으로 보자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표현이 딱 적절할 것이다. 

김희태 역사여행1.jpg

 낭산의 정상에 자리한 경주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여인이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골품제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오직 성골(聖骨)만이 오를 수 있었다. 때문에 성골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했는데, 바로 근친혼(近親婚)이다. 지금이야 근친혼이라고 하면 금기시되는 단어지만 과거에는 신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근친혼이 있었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조의 경우 합스부르크 립(Habsburger Unterlippe)이라는 유전병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근친혼의 사례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울산에 있는데, 바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다. 

김희태 역사여행2.jpg

▲ 망월사 대명전에 있는 선덕여왕의 위패와 초상

 해당 각석에는 원명(을사, 525)과 추명(기미, 539)이 있는데, 대략의 내용을 보면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의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이 어사추여랑과 함께 천전리 계곡을 찾았는데, 이들의 관계는 우매(友妹)로 표현된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추명에는 사부지 갈문왕의 아내로 지소부인이 등장한다. 이때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부인과 아들 삼맥종과 함께 천전리 계곡을 찾아 추명을 남겼다. 지소부인은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로, 사부지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니 이 경우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삼맥종인데, 바로 신라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다.   

김희태 역사여행3.JPG

▲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원명과 추명

 그런데 사부지 갈문왕이 지소부인과 혼인했던 이유를 골품제를 두고 대입시켜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왕은 성골만이 오를 수 있었기에 사랑이 아닌 성골의 혈통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성골)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성골)이 혼인해서 낳은 아들인 삼맥종(성골)이 왕이 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골의 혈통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대에 이르러 문제가 되었다. 당시 신라 왕실의 가계를 보면 진평왕은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인 천명(天明)과 덕만(德曼, 선덕여왕)이 있었고,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딸 승만(勝曼, 진덕여왕)을 두었는데, 후계자 가운데 성골 남자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김희태 역사여행4.JPG

▲ 경주 진흥왕릉(사적 제177호)

 결국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성골의 지위에 있었던 덕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이가 선덕여왕이었다. 그리고 후사가 없었던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마지막 성골인 승만, 즉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진덕여왕 사후 성골의 혈통이 끊기게 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시대 구분을 성골의 혈통이 끊기는 진덕여왕 시기까지를 상대(上代)로 규정했다. 반면 진성여왕의 사례는 앞선 두 여왕의 사례와는 다른데, 경문왕의 자녀인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과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진성여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이었고, 앞서 두 여왕이 즉위한 사례가 있었기에 큰 거부감이 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김희태 역사여행5.jpg

▲ 경주 진덕여왕릉(사적 제24호)

 때문에 신라에만 여왕이 있는 건 딱히 여성의 인권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덕여왕 때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이 난을 일으켰던 명분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였던 것과 김부식이 선덕여왕의 시대를 가리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논평을 했던 것을 보면, 당대에도 여왕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신라의 여왕은 골품제가 빚어낸 하나의 결과물이기에 오늘날의 시각으로 여성 인권을 결부시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으며,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역사여행6.jpg

▲ 경주 포석정지(사적 제1호), 신라 쇠망의 한 장면을 담고 있는 현장이다

 하지만 신라의 골품제는 신라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데, 능력이 아닌 혈통에 좌지우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마치 오늘날 재벌 2세·3세의 갑질이나 범죄 등의 횡포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신라의 쇠퇴가 가속화되어가던 894년(진성왕 8) 2월에 신라의 명망 있는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일십여조(時務一十餘條)를 올리며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견훤의 후백제로 독립한 상태였고, 궁예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던 때였다. 바야흐로 후삼국의 서막이 열리던 시대였음에도 신라는 이러한 개혁안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쩌면 소화할 수 있는 역량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변화되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 신라는 포석정의 비극(927)과 경순왕의 귀부(935)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지방과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능력만 있다면 꿈을 그려볼 수 있는 왕건의 고려였다.

★자치돌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20617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희태의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신라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骨品制)”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