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삼국시대에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백제 땅에 속해

4세기 후반 ‘백제’, 5세기 ‘고구려’, 6세기 중반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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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토기, 기와가 다량 출토된 평택무성산성지 <출처 = 평택시청 홈페이지>
 
◆ 삼국시대
 
 평택지역은 삼국시대에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백제 땅에 속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이에 대항하는 백제와의 공방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지역은 4세기 후반에는 백제의 영토에 속했으며, 5세기에는 고구려에, 6세기 중반에는 신라에 속하게 됐다. 백제의 지방조직은 4세기 중엽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정비되고 이 시기 지방 통치조직은 담로체제(擔魯體制)다.
 
 한성시대부터 마련돼 웅진도읍기까지 실시됐던 담로제는 성왕(聖王)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방(方)-군(郡)-성(城)체제로 정비됐다. 각 방성(方城)에는 1,000명 내지 700명의 군사가 배치돼있고 방성의 장관인 방령(方領)이 통솔했다. 군(郡)의 장관을 군장(郡將)이라 하여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배속된 군병은 일반민들로 충원했다.
 
 고구려의 지방통치조직의 편제방식은 성(城)을 중심으로 군사적·행정적 중요도에 따라 네 등급으로 구분됐다. 욕살(褥薩)이 파견된 대성(大城)과 처려근지(處閭近支)가 파견된 성, 가라달(可邏達)이 파견된 성, 누초(婁肖)가 파견된 성 등이다. 욕살이 파견된 대성은 행정구역이며, 부(部)의 중심성으로 군사령부가 위치했다. 지방관은 지역에서 행정상 최고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군지휘관으로서의 기능도 있었다. 대성(大城)의 장관인 욕살은 지방관이며 지방군사조직의 최고지휘관이었다. 고구려의 군부대는 일반적으로 당(幢)이라 했다. 당의 지휘관은 중앙의 귀족 출신들이 맡았지만 당에 배속되는 군사(軍士)는 일반민을 주로 동원하는 체제였다.
 
 신라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 집중되면서 각 지방 수장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이 해체돼 국왕 휘하로 일원화됐다. 국가체제 정비와 더불어 정복적 팽창활동과 삼국 사이 전쟁으로 군사조직의 규모도 확대되고 중앙과 지방에 다수의 군부대들이 설치됐다. 군부대의 명칭은 기본적으로 당(幢)·정(停)이 사용됐다.
 
 진흥왕대에 군사조직도 확대·개편됐다. 진흥왕대에 지방에 배치된 핵심군단으로 상주정(上州停)·하주정(下州停)·신주정(新州停)·비열홀정(比列忽停)·하서정(河西停)이 있었으며, 각 정은 주(州)의 중심지에 배치돼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535호)에서는 ‘통일신라 군사제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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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삼국시대 군사제도의 변천과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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