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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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두새벽에 눈을 떴다. 심신이 무겁다. 시차 적응이 안 돼 밤새 잠을 설친 데다 새벽녘 세찬 빗소리에 놀라 지레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고 마주한 아침 식단. 한눈에 절인 포도에 손이 갔으나 대뜸 입에 맞지 않았고, 다디단 주스 대신 미지근한 우유를 딸아 삶은 달걀과 빵으로 빈속을 달랬다. 방에서 아내와 모닝커피를 나누고 오른 버스, 문제는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여행의 절반은 날씨에 달렸다는데 이토록 비바람까지 거칠게 불어대니 다들 근심 어린 눈빛이다. 비야 오건 말건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수탉의 울음소리. 유독 닭고기를 좋아한단 말의 증거다. 수수한 주택가. 가이드는 이들의 1인당 GDP를 25,000달러라고 했지만 필자의 추정으로는 그보다 낮춰잡을 수밖에 없다. 전반적인 의식주의 모양새로 보면 더도 덜도 아닌 중진국 수준이다. 차창 밖에 비친 야산의 능선은 우리나라를 닮았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포르투갈공화국(Portuguese Republic). 남한보다 조금 좁은 면적(약 9만 평방킬로미터)에 상주인구는 1,000여 만이고 리스본에만 약 200만 명이 모여 산다. 수도권의 집중도가 20%를 넘나드는 것까지 우리를 빼닮았다 했더니 아닌 게 아니라 성격에 소심한 데가 있어 대놓고 남에게 싫은 소릴 못할 만치 소극적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시멘트로 대충 땜질한 구석마저 엇비슷하다.
 
  가이드에게 배운 현지 인사말은 ‘몬디야’, 내친김에 다 같이 로이 기사를 향해 아침 인사를 건넸다.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운전하는 모습에서 이들의 직업관을 읽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거야말로 세상을 당당히 사는 요체일 터, 그야말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걸 눈앞에서 확인하는 참이다. 포르투갈은 리스본항구를 거점으로 이베리아반도 서부에 총 878km의 해안선을 소유한 해양국가. 강폭이 20km에 달하는 떼주강에 1966년 독립을 기념해 당시의 독재자 살라자르가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본떠 건설한 사이오다리를 건너,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곳은 신트라와 까보다로까. 한두 마리 지붕 위를 나는 갈매기만 아니라면 여기가 대서양 연안이라는 징후조차 없다. 목하 팀원들이 머무는 땅은 북위 36도. 위도로 치자면 되레 한국보다 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철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로 인해 늘 푸른 대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습도가 높으니 눅눅한 기운은 어쩔 수 없으되 기실 방도가 없는 건 아니란다. 서둘러 우리의 온돌문화를 받아들이면 단번에 해결될 일을 냉큼 풀지를 못하니 해묵은 과제를 떠안고 사는 셈이리라. 냉큼 고칠 점은 아침에는 소식, 저녁에는 과식하는 습관. 이로써 배불뚝이가 많은 까닭이 밝혀진 터였다. 더불어 유난히 대머리들이 흔한 바도 식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시 저기압 지대인 데다가 짜게 먹는 식습관도 건강을 망치는 주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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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는 벌써 서너 차례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도 모르게 유명해져 있더라는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을 들먹이고 있다. 용케도 산업혁명의 소용돌이를 비껴갔다지만 그렇다고 마냥 칭찬을 받을 만큼 대자연을 잘 보존한 것 같지는 않다. 밀, 올리브, 옥수수 농사가 대부분이라는 해설을 들으며 가다가 현수교 한가운데서 큼지막한 예수상을 만났다. 바스쿠다가마가 안방처럼 드나들던 강물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 필자의 눈에는 오래 전 무슬림이 지배하던 시절의 아픔이 역사의 생채기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1755년 리스본에 들이닥친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있었다.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을 맞아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 시민 27만 명 중 1/10 이상이 몰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단다. 기가 막힌 건 그것이 10여 차례에 걸쳐 어린이까지 동원했던 십자군 원정으로 지은 죄의 결과라거나 신령과 진리를 떠난 예배자의 심중을 돌아본 게 아니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 신은 죽었다고 치부하며 일시에 무신론과 범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리스본을 가톨릭의 시녀라고 비아냥거리기 전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로마서 10:10)을 잃어버린 이들이 가엾기 그지없었다. 현상을 보고 본질을 망각한 처사. 이들이 믿었던 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프로필
 
-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이충동에서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감.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1년째 연재 중······.

※ 다음호(533호)에는 ‘포르투갈의 풍광 : 후줄근한 신트라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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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포르투갈의 풍광 : 떼주강변에 묶인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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