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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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서로 간에 별반 관계라곤 없어 뵈는 두 호(號)를, 이처럼 선뜻 글월의 제목으로 묶은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까닭인즉 이번 여름연수기간 동안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헤치고 기껏 돌아본 데가 백담사 한 군데뿐이었으며, 거기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흔적을 심상치 않게 만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우리는 예정대로 백담사를 찾았다. 백담사(百潭寺). 소재지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내설악. 일찌감치 만해가 승려생활을 좇아 지적 개화를 이룬 곳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우스꽝스럽게도 정작 여기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전직 대통령이 유배되면서부터였다.
 
 가야동 계곡과 백운동 계곡이 만나 수렴동 계곡을 만들고, 굽이굽이 그 물줄기가 모여들어 백담계곡이 되었단다. 목하 한여름임에도 산세가 워낙 수려하고 길바닥이 매끈하여 끈적끈적한 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린들 대자연을 음미하면서 걷기에 누구 하나 짜증 부림이란 없었다.
 
 내설악을 대표하는 절간. 원래는 신라 진덕여왕 때 승려 자장이 세운 ‘한계사’였단다. 그 후 수차례의 소실을 거듭하며 ‘심사’에서 ‘영취사’로, ‘백담사’에서 ‘심원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는 흥망성쇠의 지난(至難)한 세월을 겪은 끝에서야, 조선말에 이윽고 백담사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노라고 입간판에 씌어있었다.
 
 안내인의 설명을 귀담아 들으니 백담사라는 명칭을 갖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구비(口碑)되어오고 있었다.
 
 연이은 화재를 견디다 못해 절 이름을 고쳐보려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홀연히 산신령 같은 백발노인이 나타난다. 노옹 왈, 대청봉에서 이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보라고 한즉, 이튿날 손꼽아 헤아려보니 틀림없는 100개였다. 허나 정확하게 연못이 백 개라기보다는 그저 여기저기 많다는 의미일 터이고, 진저리나도록 화마에 시달리다 보니 아예 이름자에 물의 뜻을 담아 재앙을 피해보려는 의도였으리라 추측된다. 그 후 한동안은 아무 일이 없었으나, 1915년 겨울밤에 또다시 불이나 건물 70여 칸은 물론 아까운 경전과 종각까지도 흔적 없이 살라버렸으며, 1919년 중건된 이후에도 6.25 전란 중 다시 한 번 소실되어 1957년에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모습으로 지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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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담사 전경 <출처 = 백담사 홈페이지> 
 
 앞에는 사시사철 노래하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울울창창한 잣나무 숲을 끼고 앉은 호젓한 산사. 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꼽히는 보물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얼마 전 완공된 ‘수심교(修心橋)’라는 석조다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백담사 앞마당까지 맞닿아 있어, 이곳으로 오는 길목을 한결 운치 어리게 꾸며주고 있었다. 하지만 증축된 몇 채의 한옥이 절의 얼굴을 송두리째 가려버려, 왠지 그 옛날의 고즈넉한 풍광을 앗아간 듯한 안타까움만은 끝내 어쩔 수 없었다.
 
 기실 백담사는 배달겨레의 선각자 한용운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곳 화엄당에서 청사에 길이 남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행여 이 불세출의 업적을 놓칠세라 얼마 전 후세인들은 부랴부랴 경내에 그의 장엄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만해기념관’을 세웠고, 앞뜰에는 그가 아꼈던 시 ‘나룻배와 행인’을 아로새긴 석비와 나란히 그 분의 흉상이 서있다. 나는 차가운 돌판에 새겨진 만해의 시구(詩句)를 한 줄 한 줄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23호)에는 ‘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 시공을 더럽힌 발자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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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심산유곡에 머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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