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조하식(한광고 교사, 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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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이쪽으로 왔다가 저 쪽으로 갔다가 충분히 헤매는 중이었다. 몇 차례 그러기를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간척지 어귀를 찾아냈다. 과연 정주영이었다. 한눈에 거대한 그룹을 일군 경영의 귀재다웠다. 이러니 세상에서 그의 배포를 두고 사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그야말로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노을 비끼는 지평선 위에 일렁이는 수평선이 겹치는 광경이랄까? 이런 장관을 코앞에서 목도하고도 감탄을 토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심을 넘어 무지한 소치에 불과한 터. 여기서 놔먹이듯 기른 소떼를 몰고 반세기나 굳게 닫힌 휴전선을 열어 제친 노인네가 바로 현대의 총수가 아닌가 말이다. 이만하니까 팔십 노구를 끌고 여봐란 듯이 큰소리치며 이북에 두고 온 고향을 냉큼 찾아갈 수 있었으리라. 이어 금강산을 구경하고 개성공단을 지었건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지도자에 의해 송두리째 닫혀버렸다면 이젠 역사가 개입할 순서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아쉽게도 철새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건 시방이 철새철은 아니어서다. 따라서 경탄스런 장경(莊景)을 맛볼 수는 없으나 이렇듯 일별하며 스쳐 지나간들 드넓은 들판을 대하던 연암의 마음을 얼마큼 헤아릴 순 있을 것 같다. 선진문물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보면 연경을 방문한 박지원이 끝없는 요동벌판을 보자마자 그만 기가 질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라고 해서 그만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느냐고 묻는 참이다. 이렇게 엄청난 서산간척지를 육안으로 확인한 것만 해도 수확치고는 괜찮다는 위안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서산마루 귀퉁이에 걸린 해를 등진 채 그리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시각.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게 있었다. 냉큼 ‘대호방조제’로 향하려는데 아내가 말렸다. 서두르면 큰일 난다는 충고렷다. 그렇다, 맞다. 당장 못 본들 어떠랴. 오늘 석양에 바라본 서산간척지에 포함된 것을! 비록 주마간산일망정 이만하면 서해안 일대의 진국(眞局)을 맛본 터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을! 그 쪽이야 시쳇말로 새 발의 피에나 속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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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안성천을 찾은 철새 <출처 = 김만제의 평택의 자연>
 
  꽉 찬 12시간의 여정. 충실한 하루나들이였다. 종일토록 주인장을 기다린 거실에 들어오니 창밖은 이미 어둠에 묻혀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아내의 손길은 바쁘다. 주섬주섬 미리 준비해 둔 저녁상을 차려냈다. 말도 없이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고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는 늘 그래왔듯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 차례차례 오늘 나들이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딸내미의 뼈있는 한 마디는,
  “아빠, '해뫼'라는 이름이 그리워 죽겠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살려 쓰면 안 되나요?”
  아들 녀석 또한 제 누나에게 뒤질세라,
  “엄마, 안면도 섬에서 노을이나 실컷 감상하다가 하룻밤 푹 쉬고 싶었죠, 그렇죠? 누가 엄마 맘 모를 줄 아세요? 헤헤!"
  “어머 쟤 좀 봐! 내 깊은 속내를 어찌 알았담?"
  여정 속에 슬며시 감춰둔 여심을 지레 들켜버린 아내가 눈초리를 슬쩍 치켜뜨며, 눈치머리 없는 남편을 향해 수줍음 반 애교 반으로 우수리를 던졌다.
 
  가장의 마무리 발언인즉,
  “그래, 오늘 무척 서둘렀지만 너희들이 잘 따라준 덕분에 구경 잘 하고 무사히 돌아와 기쁘다. 다들 숙제 내준 거 알지? 푹 자고 내일까지 기행문 정성껏 써서 낼 것, 이상!”
  짧건 길건 여행이란 늘 값진 삶의 여백이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두는 불가할 터. 고로 형편이 닿는 한 여행은 유용하다. 다음은 또 어디로 떠날까? 둘러본 만큼 넓어진 시야의 감각을 챙길 수 있으므로…….
 

■ 프로필
 
국어를 가르치는 문인(수필가: 한맥문학 천료, 시조시인&시인: 창조문학 천료), 교사로서 신앙산문집, 수필집, 시조집, 시편집, 기행집 등의 문집을 펴냄.
- 블로그 -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 <평택자치신문> “세상사는 이야기” 10년째 연재 중
 
※ 다음호(514호)에는 고등학교 평준화의 길목 ‘평준화의 전제 조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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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해미읍성에서 안면도까지 ‘철지난 철새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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