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한국전쟁 이후 월남이주민 정착 및 생계 위한 정착 증가
 
진주강씨, 박사공파 18대 강호보·위보 형제 후손들 정착
 
 
평택시사.JPG
▲ 평택 남부지역 도심 
 
■ 근·현대 “급격한 인구이동으로 성씨 많이 변동”
 
 8·15 해방 및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이동으로 성씨가 많이 변동했다. 팽성·송탄 미군기지 형성과 국가·지방공단 조성 등에 따라 정착한 이주민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다.
 
 2000년 통계청 전국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서에 전국에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고 평택도 107개 성(姓)과 2,569개의 본관이 있다. 이 중 평택·진위·용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진위김씨·평택박씨·진위이씨·평택임씨·용성송씨 등 5개 성씨에서 12개 성씨가 더 늘어났다. 인구 순위는 김해김씨가 7,859가구 26,127명이고 전주이씨 7,165가구 23,616명, 밀양박씨 6,257가구 20,761명 순이다.
 
 조선시대에는 토성이 주로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 월남 이주민의 정착과 미군기지 형성, 산업단지 조성 등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라 생계 목적의 정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진위 채소단지에는 서울근교 농업을 하던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사람들도 많다.
 
◆ 진주강씨(晋州姜氏)
 
 진주강씨 시조는 강이식(姜以式)이다. 고구려 영양왕(597년) 때 도원수(都元帥)를 역임하고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5만 병력으로 물리쳤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00만 대군으로 침공했을 때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에서 승리하는데 공헌했다. 통일신라시대 강진(姜縉)이 진주지역 진양후(晉陽候)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했다. 강 씨의 본관은 문헌상 진주·금천·안동·백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인데 모두 진주의 지파이며 현전하는 강씨는 모두 진주강씨에서 분적했다.
 
 평택은 주로 박사공파 18대(통정공파 12대)인 강호보(姜浩溥, 1690~1778), 위보(渭溥, 1694~1780) 형제의 후손들이다. 조선 숙종 때인 1710년경 강호보가 평택의 김해 김씨와 혼인으로 모친 안동김씨와 누이와 팽성 함정리 선마을 근처에 입향조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후손들이 팽성읍 남산리 등에 주로 정착하였다.
 
 박사공파(통계공파)는 포승읍 석정리에 1720년경 정착해 현재 20여 세대가 있다. 이 밖에 소감공파·시중공파·은열공파·인헌공파가 각 읍면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00,724가구 966,710명, 평택시에 1,693가구 5,611명이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495호)에서는 ‘평택의 성씨분포’ 네 번째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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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의 성씨분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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