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서천사,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왜군 침입에 맞서 주둔

약사사, 크기 31cm의 석조지장보살좌상 주목할 문화재
 
 
김희태의 역사여행 증명사진.jpg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평택지역에 대한 답사를 다니다 보면 평택의 문화재 비중 가운데 불상은 4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문화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편은 아닌데,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65호)을 비롯해 만기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이 대표적으로, 이 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평택 서천사와 약사사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의 형상을 한 불상은 탑과 함께 흔하게 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령 재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처럼 돌로 만든 사례도 있고,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처럼 철로 만든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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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사 미륵전의 전경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상이나 탑은 이름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번호에서 소개할 서천사 석조여래좌상을 예로 들면 ‘서천사(소재지)+석조(불상의 재질)+여래(불상의 종류)+좌상(불상의 형태)’인 것이다. 또한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을 예로 들면 ‘약사사(소재지)+석조(불상의 재질)+지장보살(불상의 종류)+좌상(불상의 형태)’인 것처럼 불상의 이름을 통해 해당 불상이 어디에, 어떤 재질과 형태의 불상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을 방문할 때 이러한 이름의 규칙성을 알게 되면 불상과 탑의 정체성을 비롯해 이를 넘어 이들 문화재가 가지는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서천사 미륵전에 자리한 서천사 석조여래좌상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에 서천사(署千寺)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규모 자체는 그리 큰 편은 아닌 말 그대로 아담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그런 사찰이다. 이 사찰은 1352년 나옹화상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옹선사(혜근, 1320~1376)는 불교의 3대 화상(지공, 나옹, 무학) 중 한명으로, 여말선초의 시대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지금도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는 나옹선사가 태어난 마을과 창건한 고찰인 장육사가 있다. 또한 나옹선사가 출가하면서 꽂은 소나무 지팡이가 반송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고려 말 나옹선사의 명성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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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선사의 반송 이야기와 초상을 모신 전각(경북 영덕군 창수면)
 
 서천사가 위치한 지명이 방축리(防築里)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논방죽이 있어 방죽말로 불린 것에 유래했다. 예전에는 평택항이 내려다보이는 어촌마을이었다고 하니 지형 역시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여느 사찰이 그렇듯 서천사 역시 폐사와 중창을 거치게 된다. 가장 먼저 임진왜란(1592) 당시 승병을 일으킨 사명대사가 왜군의 침입에 맞서 서천사에 주둔을 했다. 또한 인조반정(1623) 당시 사찰이 불에 타 사라지는 비극을 겪기도 했으며, 이후 1870년 동파스님에 의해 미륵불이 발견되면서 다시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서천사로 불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평택시사>를 보면 서천사는 과거 수덕암으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현재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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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사 석조여래좌상의 전경
 
 서천사에서 가장 눈 여겨봐야 할 곳은 단연 미륵전(彌勒殿)이다. 오래된 건축물의 느낌을 보이는 이곳에는 서천사 석조여래좌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1호)이 자리하고 있다. 미륵전의 내부에는 보면 두 기의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이 바로 서천사 석조여래좌상이다. 앞서 불상을 구분하는데 있어 이름에서 불상의 형태를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좌상은 곧 앉아 있는 모습을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재질이 석조인 불상이지만, 외형상 돌의 느낌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또한 회칠을 두텁게 칠한 탓에 왠지 투박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제작 시기와 관련해 안내문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반으로 잡고 있다. 즉 그렇게 오래된 불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불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삼도를 확인할 수 있고, 불상의 손 모양, 즉 수인(手印)의 경우 앉은 채로 양손을 배로 모은 형태의 선정인(禪定印)의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서천사의 역사만큼이나 미륵전에서 마주한 석조여래좌상의 투박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약사사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
 
 또 다른 평택의 불상을 만나기 위해서는 안중읍 용성리로 이동해야 한다. 이곳에는 약사사(藥師寺)라는 작은 사찰이 있는데, 위치상 비파산 자락에 위치한 모습이다. <태고사법>이라는 기록에는 약사사의 위치와 관련해 비파산에 있다고 했기에 현 위치가 약사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위치의 핵심이 되는 비파산은 지금의 용성3리와 덕우1리 사이에 있는 작은 산으로, 이곳에는 비파산성지(경기도 기념물 제204호)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비파산성지를 중심으로 용성리성지를 비롯해 자미산성지(경기도기념물 제203호) 등이 자리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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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사 대웅전의 전경
 
 하지만 약사사 역시 폐사와 중창을 반복했다. 이 사찰은 842년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찰이 파괴가 되었고,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이 된 모습이다. 따라서 사찰 규모 역시 큰 편은 아니며, 옛 흔적을 확인하기란 쉽지가 않다.
 
 현재 약사사에서 주목해볼 문화재는 단연 대웅전에 자리한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이다. 처음 대웅전에 들어갔을 때 해당 문화재를 찾지 못해 계속 두리번거렸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의 크기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석조지장보살좌상의 크기는 31cm로, 일반적으로 불상으로 하면 전각의 중앙에 모시는 것에 비해 석조지장보살좌상의 경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보던 불상과는 다른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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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
 
 안내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사찰에 전해져오던 불상이라고 한다. 불상의 형태나 다른 지역의 사례와 비추어보면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형상 특징이라면 두건을 쓰고 있다는 점과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확실히 일반적인 지장보살의 형태와는 다른 모습이라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특히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연꽃에서 태어난 심청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평택 서천사와 약사사, 그리고 불상을 통해 사찰의 유래와 지역의 시대상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공간으로, 심복사 석조여래좌상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과 함께 주목해볼 평택의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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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서천사 석조여래좌상과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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